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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호수

인간을 사랑한 정령

by 포뢰

달빛 아래에 누워있는 그녀는 아름다웠으리라.

흐트러진 머리카락, 하얀 살결,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보이는 작은 앞니. 그녀는 검은 눈망울로 계륜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계륜 역시 그녀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계륜은 긴장 된 손으로 그녀의 얇은 잠옷

아래로 손을 넣었다. 아직 차가운 피부가 느껴졌다. 시선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 옥순의 눈길이

계륜의 손길을 따라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계륜이 더 깊숙이 손을 넣었다. 갈비뼈가 느껴졌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작은 가슴이 보였다. 차가웠던 피부는 피가 돌기 시작했는지 붉은 기를 띠기 시작했고, 따뜻해지고 있었다. 아니다. 어쩌면 계륜의 손바닥에서 나는 열기일지도 모르겠다.


“라미.”


그녀가 계륜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손을 따라 움직이던 시선이 계륜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 시선이 얽히자

계륜의 욕망이 널뛰기를 시작했다.

사랑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감정을 그녀도 알까?

계륜이 숨을 토해냈다.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때 옥순이 손을 들어 계륜의 뺨을

만졌다. 가지런한 눈썹을 엄지손가락으로 훑었다.


아, 이런.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자 풀냄새가 느껴졌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자 물향기가 올라왔다. 눈을 감아도 그녀가 느껴졌다. 감사했다. 그녀가 옆에 있음을. 온전히 그녀를 느낄 수 있음을.





태하는 잠시 말을 쉬었다.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라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 것 같았다. 할머니는 지금 이 곳 결계 안이 아니라, 결계 밖에서 인간들과 함께 살고 있으니까. 라희의 엄마도 할머니가 결계 밖에서 낳았을 테니까.


“어머니는 나를 낳았다. 아버지가 소원하던 딸이 아니었지. 하지만 아버지는 이제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가 아이를 낳은 후에도 죽지 않고 옆에 있었으니까. 자식을 얻고,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니 행복했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국 이 곳을 떠났다. 나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계를 벗어났다. 이 곳은 너무 힘들다고 아버지에게 보내달라고 했다는구나. 아버지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지만, 어머니를 이해한다고 했다. 그녀는 인간이니까. 이 곳은 그녀의 세상이 아니었으니까. 어머니는

결계를 나가는 조건으로 나를 남겨두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테지. 난 정령의 아들이고, 이 곳에서

태어났다. 인간의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어머니도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나를 이 곳에

남겨두라는 제안을 수락했다. 어머니는 인간의 세상으로 돌아갔고, 아버지는 힘겨워하셨지. 하지만 아들은

이미 태어났고, 아버지의 수명은 정해졌다. 아버지는 나를 키우셨지. 그 후로는 한 번도 인간의 세상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우연이라도 어머니를 본다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 것이라고…… 마음이 갈가리 찢어질 것이라고…….”


태하의 담청색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난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태하의 이야기를 듣은 라희는 가슴이 아팠다. 인간을 사랑한 정령. 그는 사랑한 여자에게 모든 것을 내 주었지만 그녀는 결국 그를 떠났다. 남자와 아들. 모두 그리움만 남았다.

태하는 곧 눈물을 멈추었다. 하지만 촉촉하게 젖은 담청색 눈동자를 들어 라희의 얼굴을 쓰다듬듯이 바라보았다. 태하의 이야기를 듣고 젖어드는 라희의 눈동자, 빨개진 코, 벌어진 입. 태하는 라희의 손을 잡았다.

깊은 숨을 내뱉은 태하는 다시 눈물이 맺기 시작한 눈으로 라희를 보며 말했다.


“이제 네 어미의 이름을 말해 주겠니?”





허선영.

그녀는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위로는 언니가 하나 있고, 아래로는 남동생이 있었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시집을 오고 근 십 년 만에 딸을 낳았다. 하지만 첫째 딸의 젖먹이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들어섰는데 그 아이가 바로 허선영이다.

그녀가 바로 송라희의 엄마다.

선영의 언니, 하영은 똑똑하고 예쁘고 야무지기로 마을에서 소문이 났다. 언니와 두 살 터울인 선영은

유년시절 내내 언니와 비교를 당하며 자라야했다. 눈썰미가 있어서 한 번 본 것은 척척 해내는 언니.

손재주도 좋아 그림도 잘 그리고, 노력파라 공부도 잘 했다. 하지만 그런 언니에 비해 선영은 모든 것이

느렸다.


그는 언니인 하영을 좋아했다. 하영이보다 한 살 어렸고, 선영이보다 한 살 많았던 그는 동네에서 가장

돈이 많은 집의 외아들이었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까무잡잡한 피부. 서글서글한 성격 덕에 뭇 여학생들에게 인기도 많았지만 그는 오직 하영이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하영은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선영은 그런 둘을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선영의 마음이 그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네 집에 냄비만 사도 알 수 있는 작은 동네. 선영은 그에게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애가 탔다. 좋아하는 그가 행복하기를 바랐지만, 언니가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기를 기도했다.



학교가 끝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시골 동네의 작은 버스 정류장.

선영이 살고 있는 동네는 종점이었다. 버스는 마을 입구로 들어선 후 크게 원을 그리고 승객을 내려준 뒤

달려왔던 길을 따라 다시 돌아갔다.

선영이 버스에서 내리자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시골의 밤은 도시보다 빨리 찾아온다.

깜깜한 밤하늘과 대조적으로 보이는 그의 하얀 교복 셔츠.

선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긴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에 선영의 운동화 끝이 닿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선영을 알아보고 이내 웃어주었지만 표정은

금세 무너져 내렸다.

9월.

때 이른 귀뚜라미 소리가 둘을 에워쌌다. 선영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니 때문이구나.’


언니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데 이렇게 아파하는 그가 미련스러워 보였다. 왜 언니에게서 마음을 접지 못하는지 그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가 원한다면 내가 그 자리를 채워줄 수도 있는데.

선영은 잠시 그렇게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왼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집까지 데려다 줄게.”

“싫어.”


의외라는 듯 그는 선영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 날 밤, 선영은 마법에라도 걸린 듯 용기를 냈다. 어쩌면 이렇게 미련스럽게 구는 그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선영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집에 같이 가면 언니를 볼 지도 모르잖아.”


그는 선영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선영은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교복 셔츠를 잡았다. 그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선영의 돌발행동에 어쩌지 못하고 놀란 눈으로 선영을 바라보았다. 오른손으로 그의 셔츠를 잡은 채 선영은 눈을 들어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오빠.”


좋아해, 내가 있을게, 언니 그만 좋아해,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한마디도 내 뱉지 못했다. 말들이 입속에서 굴러다니듯 머물렀다. 입술을 오므리고, 말을 망설이는 자신이 한심했다.

선영은 마음을 다 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오빠 좋아해.”


하지만 선영의 말을 들은 그는 짧게 실소를 내뱉으며 선영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밀어냈다. 선영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귀여운 여동생을 바라보는 오빠의 눈빛이었다. 그는 언니인 하영을 이렇게 바라보지 않았다.

그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할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선영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언니는 대학에 갈 거야. 여기에 없을 거라고.”


그는 시선을 내리더니 체념한 듯 대답했다.


“나도 알아. 내년에는 여기에 없겠지.”


대답을 하는 그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오늘 누나한테 들었어. 그리고……”


그는 눈을 들어 선영을 바라보았다. 힘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차였어. 대학에 갈 생각이라면 자기를 쫓아다니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하더라고.”


선영은 기가 찼다. 언니라면 충분히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매정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대체 어디가 좋다는 건지.


“오빠. 언니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도대체 어디가 좋은 거야?”


답답함을 담아 선영이 말했다. 그런 선영을 보며 그가 웃었다.


“나도 모르겠어. 그냥…… 누나 밖에 안보여. 철이 들고 난 후부터 계속 좋아했던 것 같아. 나한테 올 사람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의 말을 들은 선영은 마음속에 애잔함이 피어났다.

그가 그랬듯 선영도 그랬으니까. 그가 항상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으니까.

그가 언니를 바라보듯 선영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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