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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호수

노란 달맞이 꽃

by 포뢰

“네? 그럴 리 없어요. 너무나 흔한 이름인걸요?”


말도 안 돼. 라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외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밭일을 하시고, 트로트를 흥얼거리며, 몸빼 바지를 입고 작은 시골 동네를

누비시는 분이다.

외삼촌이 아기였을 때 죽긴 했지만, 삼남매를 낳으시고 일평생 외할아버지를 사랑하며 살아오신 분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무엇 하나 빠지지 않을 이 남자가 외할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다. 믿을 수가 없다.


“할머니 세대에서는 정말 흔한 이름 이예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녀의 세계에서 그 이름이 흔할지는 몰라도 월정호를 아는 최옥순은 하나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어머니야.”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확신한단 말인가.

라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월정호는 우리가 부르는 이름이다. 너희 인간들은 월평호수라 부르지. 월정호는 달이 머무는 호수라는

뜻이야. 그녀에게 그 이름을 알려준 이는 내 아버지다.”


라희는 혼란스러웠다.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할머니에게도 지금 나와 같은 소녀시절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할머니는

항상 할머니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나머지 라희는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다. 태하는 라희를 기다려줬다.

라희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려줬다.


“그럼…… 태하님이 제 외삼촌이에요?”


실소가 흘러나왔다. 외삼촌이라니.

라희의 외삼촌은 태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엄마에게 지나가는 말로 몇 번 들었을 뿐이다.

너무 일찍 죽어버려 이름도 없었던 외삼촌.

그런데 지금 전혀 다른 존재의 외삼촌이 자신 앞에 나타나다니. 엄마와 이모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태하는 주저앉은 라희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일으켜 세웠다. 충격에 다시 주저앉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태하의 손을 잡고 일어서자 어쩐지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이 태하가 쓰는 마력일까?


“네가 결계를 통과한 이유를 알겠구나. 너에게는 나와 마찬가지로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지.”


태하는 애처로움이 담긴 눈으로 라희를 바라봤다. 담청색의 눈동자는 촉촉이 젖어들고 있었다.


“어머님은 아직 살아 계신가?”




라희가 알고 있는 이야기보다 훨씬 전의 이야기를 태하가 들려주었다.

태하의 아버지는 계륜. 계륜은 호수의 정령인 아버지와 나무의 정령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이를 낳은 어미 정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 그래서 정령의 아이들은 아버지의 손에 자란다.

그 아들이 자라 인간의 시간으로 대략 20년이 지나면 아버지의 목숨은 다한다.

다행히 결계 안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기 때문에 아이는 빨리 자라고 인간보다 빠르게 습득한다.


계륜이 인간의 시간으로 10년 이상 자랐을 때 호수에서 놀고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동그랗고 까만 눈, 발그레한 볼, 앙증맞은 발가락.

아이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 호수를 찾았는데 모두 나이가 엇비슷했다.

하루는 그녀가 언니로 보이는 여자와 늦은 시간까지 호수에 남아있게 되었다.

계륜은 정령들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강한 마력을 갖고 있었지만 그 역시 정령이었으므로 빛에 약했다. 낮에는 멀리에서 그녀를 지켜보아야 했지만,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그녀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계륜은 호수의 물을 이용해 비를 내렸다. 하늘은 더욱 어두워졌다.

언니로 보이는 여자는 아이를 업고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계륜은 조용히 뒤를 밟았다.

그들은 산을 내려와 밭을 지나 첫 번째로 보이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은 상당히 유복해보였다.


아이는 점점 커갔고, 계륜은 가끔 어두운 밤에 집으로 내려가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지주까지는 아니었지만 마을에서 꽤 재력 있는 집안의 늦둥이로 태어났다.

위로는 일곱 남매가 있었다. 아이의 이름은 옥순이었다. 아이는 자랄수록 미인이 되었다.

배 꽃처럼 탐스러웠다.


어느 날 계륜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딸이 갖고 싶다고. 이때 계륜의 아버지는 이미 명이 다해가는

때라 기력이 쇠해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런 아버지가 계륜에게 말했다.


“우리 호수의 정령은 딸을 가질 수 없다.”

“왜죠? 전 딸을 갖고 싶어요. 아버지.”

“정령과 혼인 해 딸이 태어난다면… 태어나자마자 달빛을 받아 물이 되어 호수로 흘러들어간단다.”


계륜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는 힘들게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아이를 낳은 어미 정령도 곧 죽지. 아들이 태어나면 아들은 얻지만, 딸이 태어나면

아이와 어미를 한 번에 잃게 되는 게야.”


계륜의 아버지는 얼마 후 명을 다했다. 그는 물이 되어 호수로 되돌아갔다.

아버지를 잃고 혼자가 된 계륜은 허망함을 느꼈다. 그러던 중에 그 소녀가 생각났다.

계륜은 그 아이가 소녀로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이었다. 한 번도 인간을 혼인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의 주변에는

나무의 정령과 꽃의 정령, 바람의 정령들이 그의 시선을 받기 위해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는 호수의 정령답게 빼어난 미모와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녀뿐이라는 것을. 애초에 딸에 대한 마음이 커진 것도 그녀 때문이 아닌가. 인간 아이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된 계륜은 귀여움과 앙증맞음에 시선을 사로잡히지 않았나.

그녀와 함께 그녀를 닮은 딸을 갖고 싶었다.

어미 정령은 아이를 낳으면 죽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인간은 딸을 낳아도 아이 역시 죽지 않는다.



계륜은 그녀를 보기 위해 가끔 결계를 통과해 산을 내려갔다. 그때마다 그녀는 자라서 이제 어엿한 소녀가

되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볼수록 계륜은 더 자주 그녀가 보고 싶었다. 지금의 태하라면 결계를 뚫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이렇게 자주 내려가지 못할 것이다. 계륜의 외출은 가끔이 자주가 되었고, 자주는 매일이 되었다. 그럴수록 강력했던 계륜의 마력은 서서히 약해져갔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의 마음은 커져갔다.

어째야 할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 날은 밤사이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상을 촉촉하게 적시는 반가운 봄비.

열일곱 살이 된 옥순은 모두가 잠든 틈에 마루에 나와 봄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집 한켠 어둠 속에

몸을 가린 채 계륜은 그녀를 지켜보았다.

아직은 쌀쌀한 봄바람이 계륜을 훑고 지나갔다.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던 옥순이 갑자기 다리를 내려 신을

신었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봄비가 내리는 마당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무언가를 찾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눈을 들어 이곳저곳을 살펴보더니 망설임 없이 계륜이 숨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륜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옥순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륜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계륜은 여전히 어둠에 숨어있었지만 그녀 앞에 자신을 내 보이고 싶었다. 그녀와 마주서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그녀가 겁을 먹으면 어쩌지? 게다가 자신은 인간도 아니지 않은가.


이런 망설임 끝에 계륜은 한 발 옆으로 비켜서 어둠 속에서 힘겹게 보일 정도로 자신을 모습을 내 놓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어렴풋이 본 옥순은 도망가기는커녕 활짝 웃었다.

옥순의 미소는 계륜에게 구원이었다. 옥순은 숨죽여 속삭였다.


“가끔 봤어요. 어렸을 때부터.”


하지만 계륜이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지 확신이 없는 표정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속삭였다.


“혹시…… 구렁이나 너구리가 둔갑한 거 아니죠?”





“아버지와 어머니는 금세 사랑에 빠졌다고 하더군. 아버지는 아니지. 아버지는 예전부터 어머니를

사랑했으니까.”


태하는 그리운 얼굴이다.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라희를 바라보았다.

태하의 시선을 받은 라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이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매일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밤길을 걸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기다렸지. 하지만 아버지의 마력은 점점 약해졌다. 아버지는 선택을 해야 했어. 어머니에게 함께 결계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했지.”


라희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태하는 그리움이 가득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순순히 아버지를 따라 가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기뻤지. 하지만 인간의 결심보다 강력한 것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피를 먹였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밤길을 걸어 서둘러 결계를

통과했지. 결계를 통과할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지쳐있었지만, 기뻤다고 하셨다. 염원했던 여자가 자신을 따라왔으니까. 호수 근처로 오자 아버지도 점차 회복되었지.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라미라는 이름을 주었다. 동그란 그녀의 눈망울을 보고 떠올린 이름이라 하셨다. 이름을 들은 어머니는 행복해하셨다. 그리고 노란

달맞이꽃이 아직 피어있을 때 어머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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