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여우와 인간 소년
키가 큰 남자는 라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라희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토리야?”
남자의 음성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움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라희 역시 지금 이 상황이, 저 남자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그는 큰 키에 바람에 흩날리는 길고 짙은 청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어깨까지 오는 라희의 머리카락보다 더 길었다. 미풍이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그의 왼쪽 어깨는 옷에 가려져 있지만 오른쪽 어깨는 달빛에 드러나 있었다. 비단처럼 반짝이는 실로 엮어
만들어진 옷은 대충 꿰어 입은 것 마냥 제대로 여미지 않았다.
끝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소매 단 역시 화려한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성급하게 드러난 쇄골과 달빛에 비친
오른쪽 어깨가 요염한 매력을 풍긴다.
그의 모습에 넋을 잃어 라희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달빛을 받은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짙은 눈썹, 깊은 눈매와 곧은 코. 윤곽이 뚜렷한 입술.
라희가 대답이 없자 그는 라희를 향해 미끄러지듯 한 걸음 다가왔다. 다시 한 걸음. 그러더니 우뚝 멈춰 섰다. 매끈한 그의 이마와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토리가 아니군. 너는 누구지?”
라희는 여전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누구라고 설명해야 하지?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지?”
그의 물음에 라희는 더듬더듬 입을 뗐다.
“아…… 산에서…… 호수를 찾았어요.”
“……그녀의 기색이 있군.”
“……네?”
“너는 인간인가?”
라희는 눈을 깜박였다. 매력적인 이 남자가 지금 자신에게 인간이라고 물었나? 아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라희는 인간이냐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인간이 아닌 다른 개체라는 말인가?
라희에게 인간이냐는 질문은 지구인이냐는 질문만큼 황당했다.
“……네. 사람이에요.”
그러자 그는 라희를 향해 더 다가왔다. 이제 둘의 거리는 제법 가까워졌다. 하지만 담청색을 띤 그의 눈동자는 라희만큼이나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라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 순간 등을 보이며 뒤 돌아선다.
“아들을 부르지. 내 아들도 인간이다. 어쩌다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날이 밝으면 왔던 곳으로 돌아가거라.
이 곳은 반나절만 있어도 너희 시간보다 빠르게 흘러가니까.”
남자는 미끄러지듯 왔던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아, 잠, 잠깐만요.”
라희는 그를 불러 세웠다. 그는 라희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걸음을 멈췄다.
“여…… 여기는 어디인데요? 제가 지금 어디에 있길래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다는 아니지만 아들이 설명해줄게다. 그를 부르마.”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후에야 라희는 숨을 쉴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얕은 숨만 간신히 쉬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저 남자는 누구야?
라희는 뒤돌아 호수를 바라봤다. 호수는 여전히 잔잔했고, 자신을 매료시켰던 풍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아.”
커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들이란 사람이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려나?
사락사락. 풀 밟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라희가 앉은 곳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진짜 인간이야?”
여옥은 가룸의 오른팔을 끌어안고 그의 큰 보폭을 맞추며 걷고 있다.
“걷기 힘든데 이 것 좀 놓을 수 없어?”
가룸은 왼팔로 여옥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그녀의 팔을 밀어낸다.
“진짜 인간이면 내가 가져도 돼?”
“안 돼. 아버지가 날이 밝으면 보내주라고 하셨어.”
“태하님께는 보내줬다고 하면 되잖아? 결계 안에서 너 말고 다른 인간을 본 적이 없단 말이야.
그래서 갖고 싶어.”
가룸은 여옥을 내려다봤다.
“그래서 돌려보내는 거야. 보통 인간이라면 여기에 못 올 테니까.”
“아니면 잡아두었다가 우리 혼인식 때 잔칫상에 올릴까?”
가룸은 머리를 흔들며 여옥을 떼어냈다.
“욕심 내지 마. 그리고 우리는 혼인 안 해. 너는 내 여동생이잖아. 이제 그만해.”
“그렇지만 너는 사람이잖아! 자꾸 이러면 아무도 모르게 네 정기를 빼앗아버릴지도 몰라!”
“언제 적 얘기를.”
가룸은 묵묵히 걸었다. 여옥의 눈이 순식간에 빨개졌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실 가룸은 아버지가 말한 그 사람이 궁금했다. 이 결계 안에서 인간은 가룸뿐이다. 다른 인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드디어 저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작은 형체가 보인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과 처음 보는 옷을
입었다. 등이 작은 것으로 보아 아이인지도 모르겠다.
가룸은 그 인간이라는 아이에게 서둘러 가까이 다가섰다.
“네가 아버지가 말한 인간이냐?”
가룸의 목소리에 라희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등 뒤에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라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안녕하세요.”
라희는 그를 올려다보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어려보이는 이 남자가 그가 말한 인간인가?
물론 어려보인 다는 것은 매력적인 ‘그’ 보다 어려보인 다는 것이지 라희보다는 연상이었다.
하긴, 그가 아들을 보낸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 남자가 ‘그’의 아들이라는 것인가?
음…… 별로 안 닮았는데?
“나는 가룸이야. 너는 이름이 뭐야?”
가룸이라는 남자는 꽤 친근하게 다가선다. 적어도 냉랭한 ‘그’보다는 친절했다.
“아…… 저는 송라…… 히힉! 저게 뭐야?”
가룸의 어깨 너머로 불꽃이 보인다. 그러더니 마치 움직이는 불덩이마냥 라희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라희의 놀란 표정을 보고 가룸은 뒤를 돌아보지만 이내 별 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한다.
“여옥이는 백여우야. 너한테 관심이 많지.”
“네?”
눈이 튀어 나올 것 같다. 백여우라고? 전설의 고향에나 나오는 여우?
라희는 가룸의 하얀 옷자락을 움켜잡는다. 그리고 매달리듯 묻는다.
“여기가 대체 어디예요?”
그리고 순식간에 라희 옆으로 달려든 여옥이 이글이글 불타는 빨간 눈으로 라희의 목을 조를 듯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한다.
“너! 그 손 안 놔?”
가룸이라고 밝힌 소년은 짧은 머리에 하얀색 한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처럼 공들여 수놓은 번쩍이는
비단 같은 한복이 아니라 사극에서 흔히 보았던 머슴들이 입던 한복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박복한가
싶은 생각이 든다.
지금은 진정된 상태로 가룸의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아있는 백여우 여옥은 노란빛이 흐르는 하얀 머리를
땋고 있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이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모양이다.
하얀 얼굴에 빨간 입술. 고양이처럼 눈꼬리가 올라간 눈. 사납게 예뻐 보이는 인상을 갖고 있는 여옥은
라희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라희가 가룸에게 다가서지 않으면 괜찮은 모양이다.
문제는 가룸이다. 가룸은 여옥을 신경도 쓰지 않고 라희에게 관심을 표했다. 셋은 호수 근처 풀밭에 앉아있다. 가룸은 지금까지 인간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가룸이 라희에게 표현하는 관심을 여옥도 어느 정도
수긍하지만 도가 지나친다 싶을 때는 여지없이 눈동자가 빨갛게 변한다. 문제는 이 경계가 지극히 주관적이라 라희는 감도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머리를 땋고 있는 여옥 옆에 앉은 가룸은 라희를 지나칠 정도로 바라보고 있다.
“너는 어디에서 왔어?”
여옥의 존재만으로도 라희는 움츠려든다. 가룸의 물음에 대답을 해도 되는지조차 확신이 없다.
라희는 여옥의 눈치를 보며 대답한다.
“도시에서 왔어요. 방학이라 외할머니 댁에 잠깐 왔고요.”
“도시? 그 곳에는 너 같은 인간이 많아?”
“……네. 많아요.”
“도시에서는 뭘 해?”
“네? 평소에는…… 학교에 다니죠. 지금은 방학이라…….”
“방학? 그게 뭐야?”
대화는 이런 식이다. 끝이 없다. 라희는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점점 지쳐갔다.
“……저기, 가룸님.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응. 그래. 뭐?”
“여기는 대체 어디예요?”
“여기는 호수의 결계 안이야.”
“결계요?”
라희는 눈을 깜박였다. 결계라고? 그럼 이 안에 마법사가 살고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혹시 ‘그’가 마법사? 그렇다면 그 요상한 차림새도 이해가 된다.
“아까…… 먼저 만났던 가룸님의 아버님이요…. 그 분이 가룸님은 인간이라고 하던데, 그럼 아버님은
인간이 아니에요?”
“음……. 아버지는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호수의 정령이지.”
그때 여옥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라희를 다그친다.
“너는 그런 것도 모르면서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어?”
“저도 그게 궁금해요. 제가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을까요?”
가룸이 라희를 바라보며 묻는다.
“기억이 전혀 없어?”
“네. 호숫가에서 잠든 것 같아요. 그리고 눈을 떠보니까 여기였어요. 저 혹시… 죽은 건가요?”
“야! 뭐 그런 재수 없는 소리를 하니? 그럼 우린 저승에서 왔다는 거야?”
여옥이가 힐난한다. 가룸은 그런 여옥을 보고 웃음을 터트리더니 토닥토닥 여옥을 달랜다.
“그만. 여기가 처음이라 얼떨떨할 수도 있지.”
가룸의 손길을 받은 여옥은 씩씩거리긴 해도 더 이상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여옥이 잠깐 순해진 틈을 타
가룸이 말을 잇는다.
“이 곳은 아무 인간이나 들어올 수 없어. 네가 특별한 가 본데?”
“뭐? 이 머저리 같은 년이 뭐가 특별해?”
가룸은 여옥을 보고 웃으며 등을 쓸어준다. 그러자 여옥은 다시금 조용해진다.
툭하면 흥분하는 여옥과 그런 그녀를 달래주는 가룸. 라희는 둘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가룸의 생김새는 ‘그’와 닮지 않았지만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었다. 이렇게 큰 아들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가룸님은…… 몇 살이에요?”
저도 모르게 라희의 입에서 질문이 튀어나왔다.
“이 곳의 시간은 네가 살던 세계와는 다르게 흘러간대. 그래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내 성장을
잠시 멈춰 놓았어. 난 인간이라 아버지보다 빨리 늙을 테니까.”
“아버님은 호수의 정령인데, 가룸님은 어떻게 인간이 됐어요?”
“내 어미가 인간이었으니까. 어미는 날 여기에 버리고 갔어. 그걸 아버지가 키웠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가룸을 보고 라희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자기 자식을 버리고 갈 수 있단
말인가.
“난 이곳에서 태어났어. 한 번도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이 없어. 인간도 오늘 처음 보는 걸? 그래서 네가
무척 반가워.”
화르륵! 여옥이의 눈이 순식간에 빨간색으로 변했다. 머리카락 사이사이에서 연기도 피어오른다.
“너만큼은 아니지만. 여옥아, 이제 열 내려.”
가룸의 한마디에 피시식 거리며 여옥의 열이 사그라졌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어쩌다 이 곳에 굴러
떨어졌는지 모든 것이 의문점이고 궁금했지만 여옥이의 감정만은 손에 잡힐 듯 뚜렷했다. 라희는 그런 여옥이 귀여웠다. 비록 지금은 자신에게 날카롭게 이를 갈지만.
라희는 팔을 뻗어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는 여옥의 손을 잡았다.
여옥이 깜짝 놀란 눈으로 라희를 바라봤다. 라희는 여옥의 시선을 마주보며 웃었다.
“뭐야? 왜…… 왜 웃어? 나 참 별일이야. 흥!”
여옥은 괜시리 토라진 듯 고개를 돌렸지만 라희가 잡고 있는 손을 쳐내지는 않았다.
라희는 웃으며 손을 내렸다.
“해가 뜨려면 시간이 얼마나 남았죠?”
“이 곳은 해가 뜨지 않아.”
가룸이 라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정령들이 사는 결계에는 해가 뜨지 않아. 정령들은 빛에 약하거든.”
“그럼…… 항상 밤이에요?”
“응. 빛은 들지 않지. 달빛 외에는.”
“그럼 낮은 아예 없어요?”
혼란스러워하는 라희를 보고 여옥이 대답해 준다.
“우리도 낮은 있어. 이 멍청아. 해가 없는 것뿐이지.”
가룸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잇는다.
“우리는 꽃으로 알 수 있어.”
“꽃이요?”
“네가 처음에 이 곳에 왔을 때, 호수 주변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기억해?”
라희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노란 꽃이 피었다는 것 말고는 기억나지 않았다. 시간을 짐작케 해주는 다른 꽃이 있었던가? 게다가 그 노란 꽃이 무슨 꽃인지도 몰랐다. 라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요. 사방에 온통 노란 꽃이 있었던 것 말고는.”
“그건 달맞이꽃이야. 밤에는 노란 달맞이꽃이 피지. 그리고 낮이 되면….”
가룸은 라희에게 주위를 둘러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눈길을 돌려 옆을 바라보니 노란 꽃들 사이사이로
분홍색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 분홍색…….”
“그건 낮달맞이꽃이야. 그 아이들이 피어나면 우리는 낮이지.”
가룸이 미소를 지어며 말을 이었다.
“낮달맞이꽃이 피기 시작할 때 결계를 빠져나가는 게 가장 좋아. 곧 있으면 안개가 끼기 시작 할 텐데 가장
마력이 약해지거든. 정령들은 결계 근처에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빛에도 약하고 시력도 약하거든.
결계 근처까지는 내가 데려다 줄게.”
가룸이 허리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결정했어?”
“네?”
“이 곳에 무엇을 놓고 갈지 말이야.”
“네? 뭘…… 놓고 가야해요?”
라희는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가룸은 의아하다는 듯 라희를 바라보았다.
“결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네가 갖고 있는 것을 한 가지 이 곳에 두고 가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