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이름
가룸은 라희를 아버지에게 데리고 가기로 했다. 가룸에게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던 여옥은 ‘아버님에게
간다’고 하자 놀랍게도 바로 물러섰다.
“태하님은…… 좀…….”
새초롬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멀찍이 떨어졌다.
가룸과 함께 걷는 내내 라희는 혼란스러웠다.
무언가를 내 놓아야 한다니. 내가 갖고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걸?
“가룸님. 제가 이 결계에 들어온 첫 번째 사람인가요?”
주변에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만약 나가야 한다면 지금이리라.
“그건 아니야. 오랫동안 인간이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지, 네가 처음은 아니야.”
“그럼… 전에 왔던 사람들은 뭘 놓고 갔어요?”
가룸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그렇게 잠시 걷다보니 저 멀리서 태하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개 너머 보이는 태하는 나무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마지막에 결계에 들어왔던 사람은 내 어미야.”
느닷없이 가룸이 말을 시작했다. 라희는 가룸과 보폭을 맞추어 걸으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소년처럼 보이는 앳된 얼굴. 나이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어림잡아 열일곱? 열여덟?
하지만 아버지가 그의 성장을 멈추었다고 하니 실제로는 더 나이를 먹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곳은 나이가 무의미 할까? 그는 숱 많아 보이는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내 어미가 결계를 통과하기 위해 놓고 간 것이…… 바로 나야.”
“아……,”
“그래서 난 이 곳에서 자랐어. 아버지 손에.”
라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그에게 무슨 위로의 말을 건넨단 말인가.
게다가 라희는 가룸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다. 오늘 처음 보지 않았나.
가룸은 걸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라희를 내려다 봤다.
“결계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네 몸에 있는 것, 네 몸에 있던 것을 내놓아야 해. 하나밖에 없는 것을.”
잠시 말을 멈춘 가룸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가끔 엄마 생각을 하곤 했어. 나를 버릴 정도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지금은 그런 생각마저 아무
의미 없지만.”
가룸을 바라보는 라희의 마음이 아파왔다. 아직 부모에게 버림을 받지 않았지만 라희의 부모도 이혼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가. 라희가 어찌할 사이도 없이 아빠와 엄마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자신도 둘 중 한명과 살아야했다. 부모와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은 욕심이란 말인가?
“일단 결계를 빠져 나가면 다시는 이 곳에 들어오지 못해. 결계 안에 마력을 갖고 있는 존재가 너를 데리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그런데 이제 그런 존재가 거의 없어. 예전에 할아버지나 가능했던 일이야.”
“태하님은 정령이니까 마력을 쓰지 않나요?”
가룸은 멀리 보이는 태하의 실루엣을 눈으로 찾고 있었다.
“인간을 결계 안으로 데리고 오는 일은…… 생각보다 강력한 마력이 필요하다더군. 아버지는 할아버지만큼 마력이 강하지 못해. 아버지가……가능할지 모르겠어. 아버지는 인간과 정령의 혼혈이거든.”
“무엇을 내 놓을지 결정했느냐?”
라희를 내려다보는 담청색 눈동자. 그 눈을 감싸고 있는 길고 풍성한 속눈썹 역시 담청색이다.
밝지도 않은 달빛 아래에서 어떻게 이렇게 선명하게 보일까? 라희는 궁금했다.
“아니요. 저는…… 내 놓을만한 것이 없어요.”
라희는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태하는 그런 라희를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았다.
“……너는 이 곳에 어떻게 들어왔지?”
태하의 물음에 라희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어렸을 적에 엄마와 이 호수에 온 기억이 있었어요. 그래서 호수를 찾고 싶었죠.”
엄마 이야기를 하자 라희는 눈물이 났다.
결계에 갇혀 있는 동안 자신을 찾고 있을 엄마와 할머니가 그려졌다.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이라 정확하지 않았어요. 산 속을 헤매다 겨우 호수를 찾았죠. 잘 모르겠어요. 잠깐
잠이 든 것 같은데….”
태하가 미심쩍다는 듯이 라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어머니는 이 호수를 뭐라 부르지?”
라희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들어 태하를 바라봤다.
“엄마는 호수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월평호수라고 불러요. 하지만 호수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어요. 할머니는 가끔 월정호라고 부르지만…….”
“잠깐.”
태하는 라희의 말을 멈추게 했다. 라희는 말을 삼킨 채 울먹이며 태하를 올려보았다.
태하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더니 고개를 돌려 가룸을 바라보았다.
“노루들을 챙겨야 할 시간이구나.”
감미로운 태하의 목소리가 라희의 귀를 간질였다. 목소리만으로는 노루가 아니라 루비라도 언급한 것
같았다.
“네. 아버지.”
가룸은 태하의 말을 알아듣고 자리를 피했다. 가룸이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태하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할머니의 이름을 알고 있느냐?”
“네. 태하님.”
태하는 라희를 바라보았다. 담청색 눈동자에는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이름을 말해 보거라.”
“……최옥순 ……이요.”
이름을 들은 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도 떼지 않았다. 그저 라희를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이윽고 태하가 라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녀가 내 어머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