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이, 삼, 사..."
지금은 너무도 쉽게 읊는 그 숫자를
나는 우리 할머니에게서 배웠다.
회색 줄무늬가 나란히 그어져있는 하얀 종이 머리에는
할머니가 곱게 쓴 숫자가 적혀있었고
그 아래에 연필로 꾹꾹 눌러쓴 내 느릿한 목소리가 빼곡하다.
할머니의 사랑 아래 해가 천천히 기울듯 배운 그 숫자들이 스치듯 읽힐 때쯤
내가 할머니에게서 그것들을 배웠었다는 사실도 희미해져갔다.
해가 기울던 어느 여름날 만난 우연한 장면에 문득 어릴 적 내 기억들이 땀처럼 배어 나왔다.
다소 고집스러워 보이는 손녀의 앙 다문 입, 그 손녀를 지는 해보다 온도 높은 눈으로 지켜보는 할머니.
"할머니, 그거 기억 나나? 숫자, 내 할머니한테 배웠다 아이가"
"모르겠다. 기억 안 난다 이제..."
희미한 할머니의 말에 너스레웃음으로 답했다.
그저 읽어내려가는 모든 숫자에서 할머니를 기억하기로 마음을 삼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