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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잇Eit Aug 11. 2023

<죽을 이유를 찾아 살아간다>를 읽고


서현역 칼부림이 발생했던 날, 나는 그 며칠 전에 다 읽었던 이 책을 떠올렸다. 분명 대립에 대해 읊어내고 있긴 하나 결론적으로는 제목에 대한 외침이 분명히 있는 책. 경쟁과 대립에 대한 개념이 희미해진 척하는 시대에서 많은 이가 갈망하는 것은 '살아갈 이유'인지 '죽을 이유'인지 다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이 책을 처음 뽑아들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 헤매던 최근, '이 시점에서 살 이유는커녕 죽을 이유라니, 매력적이군'이란 터무니없는 생각에서 뻗친 손길이었다. 달리는 KTX안에서 무덤덤하게 펼쳤던 책의 시작은 다소 지루했다. 소설 자체의 내용보다는 작가 아사이 료의 섬세한 문장에 매료되어 책을 이어갔다. 옴니버스 영화의 장면들처럼 이야기는 계속 흘러갔다.


1989년부터 2019년까지의 일본 헤이세이 시대를 배경으로 소설은 써내려져 간다. 작가가 헤이세이를 '대립의 요소를 제거하는 시대'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사실 소설 내내 '보이지 않는 대립'의 존재성을 풀어내고 있다. 작가는 두 주요 인물이 나오는 시점부터 지속적으로 '대립'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바다족과 산족에 대한 설정 안에서 각각에 해당하는 반대 성격의 두 인물이 등장하며 소설이 끝나는 시점조차 그 대립은 끝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되는 것 같았다.


조금 더 깊은 눈으로 바라보게 된 캐릭터는 단연코 산족으로 표현되는 유스케다. 끊임없이 무언가와 싸우는 듯한 모습이 역력한 이 캐릭터는 경쟁이 사라져가는 헤이세이 시대의 특정한 환경에 반항하는 것처럼 비추어졌다. 경쟁에서 승리를 따내고 항상 정상에 있던 그의 모습은 경쟁이 사라질수록 함께 스러져가는 것 만 같다. '살아있다', '존재 자체로 충분하다', '너는 너대로 충분하다' 와 같은 말로도 유스케는 자기 존재에 대한 가치를 찾을 수 없는 듯 했다. 소설 초반부터 계속 부정했지만 결국 나는 유스케에게서 나를 읽었다. 세상 속에서 내가 가지는 의미를 찾는, 사람 그리고 사회와 나를 연결하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 나를 끝내 부정할 수는 없었다. 


작가는 자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의 해석대로라면 자멸이 비단 '자신을 멸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작품의 해설에서는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는 타자와 사회가 모두 망하기를 바라게되는 '폭발' 또한 자멸의 또 다른 끝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회가 병들었다는 느낌이 크게 덮쳐오는 요즘, 혐오와 외로움 고립 등의 단어가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문을 두드리며 사회를 감염시킨다. 그렇게 '사회 속 내 가치와 의미가 없어!' 라는 잔뜩 뒤틀린 몸부림들에서부터 이어진 범행 사건들이 줄줄이 뉴스를 꿰차고 있다. 


소설은 마지막 장에서 궁금증을 남겼다. 과연 유스케는 작가가 말하는 어떤 '자멸'에 끝내 이른 것일까. 유스케의 행동들이 자멸 또는 사회 속 폭발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유스케가 지금껏 살아온대로 그저 자신의 역할을 계속 찾아 살아가고 있길 바랐다.


내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손에 들었던 소설에서 '나는 나대로 괜찮은 것이 맞을까?'에 대한 약간의 위로를 받았던 책 정도로 책의 리뷰를 마무리해 두고 싶다.




난 말이야. 죽을 때까지 역할이 필요한 것뿐이야.

내게 남아있는 시간을 '살아도 되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은 것뿐이라고.

그게 무엇이 되었건 간에 마찰이 없으면 체온이 사라져버리거든.

<죽을 이유를 찾아 살아간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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