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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씀 Dec 18. 2021

눈길에 눈길을 주다

# 눈보라 치는 밤에.


아무리 어둡고 험난한 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고, 아무리 가파른 고갯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통과했을 것이다. 아무도 걸어본 적이 없는 그런 길은 없다. (법정스님)


남도에 폭설 예보가 내렸다. 자발적 고립을 선언하자, 내리는 눈발이 더욱 거세지며 나를 돕는다. 마치 내가 좋아하는 East Root의 <눈보라 치던 밤>을 듣기라도 하는 듯, 그 피아노 음률에 맞추어 눈이 내린다. 눈이 오면 끔찍했던 백골OP 진입로 제설작업이 생각나고, 강원도 첩첩산중에서 그 작업을 이어받았을 아들이 생각난다. 내가 살아온 것도 저 눈길과 같지 않을까. 내 뒤로 발자국이 따라오는 줄 모르고, 함부로 걸었던 젊은 날의 눈길. 더 자주 돌아보며 걸었으면 좋았을 그 길. 이제 아무리 쓸어내도 흐트러진 발자국들은, 이미 길이 되어 버렸다. 


그래, 나 홀로 개척자가 되어,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세상의 모든 길에는 앞서 지나간 이가 반드시 있으니. 길이란 지나간 사람의 발자국으로 만드는 증빙서류. 앞서 간 이가 없으면 태어나지 않는 흔적이다. 심지어 풀숲을 헤치고 나 스스로 만들며 가는 길조차도 발길이 끊겨 숨어 있던 길일 수 있다. 진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가서는 안 되는 길 뿐이다. 그러므로 나만 힘들고 험한 길을 가는 거라고 불평하지도, 나 홀로 어려운 길을 개척하고 있는 거라고 자만하지도 말자. 고민 끝에 자세를 낮추어 지나갔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자.




비로소 눈길에 눈길을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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