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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씀 Feb 14. 2022

천사의 보금자리

#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


최근 들어 아내가 내가 물어보는 말에 제대로 대답을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 같은 사람 만나 평생 고생만 한 아내가 이제 나이가 들어 귀도 먹게 된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됐다. 나는 우선 이비인후과 전문의와 인터넷 상담을 하고 아내가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부터 알아듣지 못하는지 청력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 아파트 현관문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아내가 주방에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곧 현관문에서부터 아내를 테스트했다. 

 " 여보! 오늘 저녁 뭐야?"
 "......"  

나는 거실 입구에서 다시 한번 외쳤으나 역시 아내는 묵묵부답이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주방 앞에서 다시 한번 물었다. 

 " 여보! 오늘 저녁 뭐야?"
 "......"  

 '아니, 도대체 여기서도 안들린단 말인가?' 정말 마음이 아팠다. 아내의 귀가 이렇게 심각할 줄이야. 난 아내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아내 곁으로 천천히 다가가 아내의 등에 손을 살포시 얹으며 나의 질문을 되풀이했다. 속상했지만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 여보! 오늘 저녁 뭐야?"  

그때 아내가 갑자기 몸을 홱 돌리면서 소리쳤다. 

"아니, 도대체 내가 칼국수라고 몇 번을 말해! 몇 번!" 

(국민건강보험공단 책 읽는 모임, '그라뜨리에'에서 화장실에 게시한 글... 더 이상의 출처는 모름) 



헉, 슬프다. 


그런데 더 슬픈 건,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청력의 자연스러운 감소는 40대 초반부터 시작되는 거라 한다. 한쪽 귀의 청력만 떨어져도 시끄러운 곳에서는 상대방의 말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정말 그렇다. 나이가 들면 특히 고음이 안 들린다고 한다. 대부분의 중년 남성들은 14~16kHz까지가 한계이며, 대부분 16kHz 이상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그래서 아내의 소리가 잘 안 들리는 걸까? 앙칼진 고음의 여성이 내는 목소리, 바가지를 긁는 날카로운 잔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니... 이것은 다행인가, 불행인가.



남도


서쪽에 있는 천사의 다리를 건너 <섬 아닌 섬>을 다녀왔다. 그 섬들 중 아홉 개의 백사장, 너른 들판이 펼쳐진 자애로운 섬이라 불리는 자은도(慈恩, 너그러운 마음)가 목적지였다. 우리 부부에게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천사대교>는 전남 신안군 압해도(押海島)와 암태도(巖泰島)를 연결하는 연도교(連島橋)로 2019년 4월 4일 개통되었다. <천사대교>라는 명칭은 1,00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신안군의 지리적 특성을 반영하여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1,004개의 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도로 많은 섬이 모여 있다는 말이리라. 다리 덕분에 암태도, 자은도, 안좌도, 팔금도, 자라도, 추포도 6개가 섬의 지위를 잃고 <섬 아닌 섬>으로 살게 되었다. 참고로 천사대교는 10.8km로 영종대교, 인천대교, 서해대교에 이어 4번째로 긴 해상교량이라 한다. 



천사대교를 건너


<기동삼거리>에 이르면, 어쩔 수 없이 동백꽃 파마머리의 노부부와 만나게 된다. 최근 핫해진 퍼플섬으로 가는 좌측 길과 자은도로 가는 우측 길 사이에서 고민하다 보면 <천사의 보금자리>라는 문패를 단 시골집 담벼락이 눈길을 잡는다. <문병일♥손석심> 부부의 보금자리라고 당당하게 말을 한다. SNS에서는 <동백꽃 파마머리>라고도 하고, <동백꽃 부부>라고도 하는 것 같다. 많은 사진들이 올려져 있지만, 딱 지금이 동백꽃 헤어스타일의 완성이라 생각한다. 정말로 벽화와 잘 어울리게 동백꽃이 만발했다. 참 보기 좋다. 그런데 아저씨 머리 한쪽은 탈모가 진행된 듯하다. 아주머니 머리에 비해 꽤나 덤성덤성하다. 천사의 보금자리에서도 세월은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그 긴 세월을 <천사의 보금자리>를 같이 지켜내고 있는 부부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사람들은


처음에 <사랑>으로 부부가 되었다가, 같이 산 세월의 <정>으로 살게 되고, 결국에는 <의리> 때문에 사는 거라고 한다. 나도 처음엔 아내가 여자로만 보였다. 그러다가 친구로 보이기 시작했고, 삼십 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아내가 <나>로 보인다. 그래서 아내가 없으면 내가 없는 것 같다. 저 부부도 그럴 것이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두 사람이 만났으니 어찌 충돌이 없겠는가. 이 사람은 나와 다르구나 인정하지 않고, 그것은 틀렸고 잘못이라 지적하면 상처만 남는다.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같이 살 만한 것이다. 그래서 사는 재미라 하는 것이다. 부부로 산다는 것은 그런 거다. 다름을 알아가는 긴 여정이다. 이제는 다른 마음으로 살아보라고 누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동백꽃 펌이 가장 잘 나오는 시기에 여길 올 수 있어 좋았다. 건강한 몸으로 아내와 같이 올 수 있어 기뻤다. 나는 동백꽃 하나를 주워 아내에게 건넨다. 받아, 내 마음이야.





동백꽃의 꽃말은...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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