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무.
몸의 중심은 심장인 듯하지만, 몸이 아플 때는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가족의 중심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픈 사람이어야 하고, 세상의 중심 또한 힘든 이웃이라야, 우리 사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보다 딱 하루 더 사는 것이 소원인 대구 중증장애인 엄마들의 모임, '담장 허무는 엄마들' 중)
상처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가족 중에 아픈 이가 있으면 자연스레 그를 중심으로 가정사가 돌아가게 된다. '아이보다 딱 하루 더 사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에 눈이 먹먹하다. 아픈 아이를 이 세상에 두고선 차마 눈을 감을 수 없다는 엄마들. 약자를 중심에 두고 강자들이 주변을 막아주는 진형이 당연한 것 아닌가. 분명 원시시대부터 그러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 강자가 중심에 서고 약자들이 주변이 되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일까. 언제부터, 아프거나 약한 이가 홀로 설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일까. 우리 분명하게 인식하자. 세상을 지속 가능하게 해 주는 진형이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상처를 중심에 두는 세상을 만드는데 동참하자.
우리는,
잘 모르는 사람을 칭찬하면서도, 정작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상처를 주곤 한다. 엄마 친구의 아들은 항상 똑똑하고 착하며, 옆집 아저씨는 다 가정적이고 훌륭하다. 오직 내 자식들과 내 남편만 내 마누라만 못났다. 이런 사고의 왜곡이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중년 남자들은 어떠한가.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친절하면서, 집에만 오면 퉁명스럽고 불친절하기 그지없다. 밖에서 어쩔 수 없이 억누른 감정을 집에서는 더 이상 참고 싶지 않다는 것일까.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은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란 말이다. 함부로 생각하지 말고, 함부로 상처 주지 말자.
사람들은,
자기 편인 사람에게 신세 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한편인데 그럴 수도 있지, 부담 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자기와 함께 사는 것이 그에게도 행복한 일이라 생각한다. 틀렸다. 내 편이면 내 사람이면, 내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누가 용인했단 말인가. 위험천만한 착각이다. 이런 교만한 착각은 사람들에게 실망감과 상처를 준다. 내 편이면 내 사람이면,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고 아껴주는 거다. 그를 내 중심에 두고 상처입지 않도록 지켜주고,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거다. 그것이 함께 있는 사람의 책무인 것이다. 함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무인 것이다. 그 책무를 소홀히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