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차피 지나갈 것은 지나가는 거야.
버티는 것이 버거운 순간에도 시간은 흘렀다. 사실 그 시간을 버텨야 한다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기약을 할 수 없다는 의문이었다. 그럼에도 놓지만 않는다면, 지나갈 것은 결국에는 지나갔고, 고개를 드니 내 앞에는 다른 세상이 있었다. (이솜,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중)
아이스 아메리카노,
이 녀석은 자본주의의 변이다. 자고로 식은 커피는 굳은 찬밥과 함께 초라하고 쓸쓸한 것인데, 왜 뜨거운 커피보다 식은 커피가 더 비싼 것일까? 얼음을 넣어 차갑게 식힌 커피 말이다. 고속도로 휴게소 커피점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의문에 잠겼다. 늦은 밤 기다리던 아내 손에 쥐어준 병에 든 커피도 주머니 속에서 오래도록 데워 낸 커피였고, 추운 날씨가 아닌데도 떨고 있는 시험장 앞에서 선배들이 타 준 커피도 따뜻한 커피였는데... 그 시절 커피는 뭉클한 가슴 맛이 났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 들고 달궈진 차 문을 여는 순간, 훅- 뜨거운 열기가 나를 덮친다. 헉 그렇구나. 그동안 숨 막히게, 숨 가쁘게 살고 있었구나. 전력질주를 계속하느라 뜨거워진 심장을 좀 식혀야 하겠구나. 빌딩 앞에서 아이스커피를 연신 가슴과 볼에 갖다 대던 신입사원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식은 눈물 맛이 났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
그 커피의 정체에 대하여는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보다가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타 준 커피가 더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헬싱키를 배경으로 2006년에 만들어진 일본 영화.
"누군가 당신만을 위해 끓여 주면 더욱 맛이 진하죠."
어느 날 중년 남자가 주문한 커피를 마시더니, 더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비법을 일러 준다. 그는 드립퍼에 커피를 세 스푼 넣고 검지 손가락을 커피에 찌르고는 주문을 외웠다. "코피 루왁!" 여주인공 사치에도 똑같이 하고 주문을 외우지만, 중년 남자는 입이 아니라, 가슴으로 외워야 한다고 알려준다. 그렇게 만든 커피를 미도리에게 타 주자, 원두를 바꿨냐며 커피맛이 달라졌다 말한다. 사람의 혀는 음식물의 성분뿐만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정성과 마음까지 식별한다. '코피 루왁!'이라는 주문 때문이 아니라, 더 맛있는 커피를 손님에게 대접하겠다는 여주인의 마음이, 주문과 함께 섞여 들어가 맛있어진 거라 생각한다. 꿀꿀한 아침, 누가 주문을 외우며 타주는 커피 한 잔이 그립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 말이다.
그래,
버티는 것이 버거울 때가 있다. 그렇지만 손을 놓지만 않으면, 지나갈 건 어떻게든 지나간다. 떠나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떠나가고. 그리고 우리가 버텨내야 하는 숱한 날들 속에는 어떤 멋진 날도 숨어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멋진 날이 혹시 오늘이 아닐까? 두근대는 기대감으로 오늘이 올 때마다 함께 모닝커피를 마신다. 만약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이 그 날일 수 있으니 더 잘된 일이고. 거창한 삶의 전략과 성과지표에 끄달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럭저럭 보잘것없는 오늘들을 성실히 살아내는 것. 행복은 결국 거기에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한 줌의 햇살과 한 소절의 노래와 바람에 넘실대는 나뭇잎 하나, 내세울 것 없지만 행복한 일상의 정경 속에서 커피 한 잔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