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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씀 Sep 18. 2023

하려고 했었는데

# 미루기와 관두기


할 일을 내일로 미뤄두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나는 일어나 손님을 맞았다.

"선생님께서 저희를 좋아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아니, 당신은 누구신데요?"

"내 이름은... '하려고 했었는데'입니다." 

(정채봉)



경탄해마지 않는,


아내의 독보적인 특기는 미루기와 관두기다. 그러다 보니 아내가 지나간 자리엔 늘 치워야 할 것들이 쌓인다. 자기는 체력 때문이라 말하지만 믿을 수 없다. 무슨 일이건 하다가 금방 그만두어 버린다.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다음으로 미룬다. 그럼 금방 다음이 되고 새로운 할 일이 더해진다. 그러면 또 그만둔다. 또 다음으로 자동으로 미뤄진다. 아, 아내는 결코 게으른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부지런한 사람이다. 단지 미루기와 관두기를 열심히 시전 할 뿐이다.



33년을 같이 살면서,


이런 아내의 특기이자 장점이 나는 부러웠다. 그래 저렇게 회사를 다녔어야 했어. 일을 저런 식으로 했어야 했어.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어>가 아니라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게 나아>라고 생각했어야 했다. 일 욕심을 버렸어야 했다. 돌아보면 일에 대하여 너무나 진지했고,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차 있었으며, 너무나 교만했었다. 결국 그 교만에 가려 나의 어리석음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죽을 듯이 몰두하여,


며칠 밤을 새워가며 능력의 120%를 써서 프로젝트를 끝내면, 고생했으니 이제 좀 쉬라고 하던가? 수고했는데 말이야, 이건 정책효과가 너무 크고 중요한 일이라 맡길 사람이 없어, 부탁해. 할 수 있지? 아 이미 능력치의 120%를 써버렸는데, 돌아오는 것은 능력치의 200%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는 것은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야 했다. 늦기 전에 아내의 특기를 사용했어야 했다.



일단 미루기 스킬을 쓴다.


보고시한이 내일 아침이건 말건 일단 미루고 정시 퇴근해서 아이와 놀아준다. 가족은 소중하니까. 다음날 정시출근해서 아직 하고 있노라, 끝내진 못했노라, 구상하고 있노라, 검토할 게 많아 속도가 안 나노라. 뻔뻔하지만 어쩌지 못하는 대답이 계속되다 보면, 어느새 그 프로젝트는 조직의 힘으로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굳이 관두기 스킬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그 일에서 빠져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 <하려고 했었는데>를 하면 되는 것이다. 정말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진짜로 하려고 했었으나 끝내 참았던, 내 인생의 숙제로 남은 그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도 인생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 안에 <하려고 했었던> 그것들이 있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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