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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씀 Jun 01. 2023

끄너

# 진정으로 끊어야 할 것들


외국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계원이 내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끄너..."

'끄너'가 무슨 말일까 싶어서 물어보았어요. 
"안녕이라는 말 아닌가요?" 나는 그 말, 어디서 배웠냐고 물어보았지요. 
"한국인들은 작별 인사할 때 꼭 그러데요. '끄너'하고요."

(이윤기, '어른의 학교' 중)



그랬다.


가족이나 아주 친한 사람과의 통화는 정말 그러했다. 고마 끊어... 자꾸 전화하고 그라노, 끊자. 이만 끊는 데이, 끊어... 물론 관계를 끊자는 얘기가 아닌 줄은 알지만. 좀 더 살갑고 정감 있는 말로 통화를 마치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가장 친한 사람일수록 가장 다정하게 대해야 한다. 가깝다고 당연한 것처럼 대하지 말자.



여보 좀 고쳐요.


아내는 늙어 갈수록 좀 유연하고 살가워져야 하는 거라고 내게 변화를 주문한다. 하지만 남에겐 한정 없이 친절하면서도 곁에 있는 이에겐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한국 남자 아니던가. 내게 부족한 것이 살가움이란 걸 안다. 찰랑찰랑 부드러운 물결처럼 사람을 대하는 그 비결을 나도 배우고 싶지만. 아무리 흉내를 내도 미간의 골짜기를 휘몰아치는 썰렁한 바람을 어쩐단 말인가. 나긋나긋하진 않더라도 심통 난 사람처럼 인상 쓰지는 마라는 아내의 주문이 또 따른다.



정말로 끊어야 할 것. 


언젠간 쓸 데가 있겠지 하며 버리지 못하는 것을 저장강박증이라 한다. 집 안에, 특히 내가 있는 방에 유달리 잡동사니가 많다며 투덜거리는 아내. 구석구석 제 혼자 쌓여 있는 고독한 물건들. 그 물건들을 보며 생각한다. 언젠가 쓸 데가 있겠지, 하며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들을. 언젠가 말해야지, 하며 저장하고 있는 말들을. 그리고 또 생각한다. 이제는 버려야 한다고. 지금껏 한 번도 연결되지 않은 전화번호를 지워 버리듯, 써먹지 못한 생각들을 버려야 한다고. 나중을 위해 저장하려는 안 좋은 습관을 끊어야겠다고. 기다리던 나중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전화기에서 그만 들어가라는 오더가 떨어졌다. 전화기를 든 채 어디로 들어가야 하나,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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