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강에서 건져낸 이런저런 <말>들
프랑스어는 논리적이고 독일어는 음악적이다. 프랑스는 평야의 나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위험이 다가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다. 따라서 눈이 발달하고 미술이 발달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는 전망이 좋은 평야처럼 명석한 말이 되었다. 외교문서에서 프랑스어판을 정본으로 하는 이유는 오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독일은 숲의 나라이다. 남부 독일에 있는 검은 숲(Schwarzwald)의 다람쥐가 나무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일 없이 그대로 북해까지 갈 수 있을 정도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숲 속에서 위험을 감지하려면 소리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독일인은 귀가 발달하고 음악에 뛰어난 민족이 되었다. 독일어는 숲 속의 미로처럼 불명확하다. 그러나 음악적인 울림만은 참으로 뛰어나다.
(슈바이처,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지대인 알자스로렌 출신)
우리나라는,
드넓은 평야도 검은 숲도 없지만 국토의 7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크고 작은 산과 그 산에서 강으로 바다로 실타래처럼 굽이치는 하천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수 십 가지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뜻은 한 가지인 언어. 형태가 다른 산골짜기에서 강으로 모여 결국 바다에서 하나로 만나는 물처럼, 우리의 말은 다양한 형태와 소리를 가지는 것이 아닐는지.
2009년 4월경,
페이스북에 'SNS'를 '언어가 흐르는 강'이라 쓴 적이 있다. 우리가 내면의 언어를 함부로 쏟아내는 것도, 흐르는 강물을 떠 마시는 것도 자유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강의 너비는 팔로우나 구독자 수에 달려 있을지 몰라도, 강의 깊이는 우리가 쓰는 말의 품격에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깊고 푸른 강을 헤엄칠만한 언어를 찾는 일에 소홀하지 말자.
말이든 글이든,
인간의 언어 중 가장 슬픈 말은 이것이다. '아, 그때 해볼걸! (It might have been!) 미국의 시인, 존 그린리프 휘티어가 한 말이란다. 그때 그 일을 해볼걸. 그 사람에게 그 말은 하지 말 걸. 조금만 더 잘해줄걸. 그렇군, 슬픈 말은 <껄껄껄>이다. 이제부터는 '슬픈 말' 대신 '기쁜 말'을 했으면 좋겠다. 아, 그때 그 일을 하길 잘했어. 그 사람에게 그 말을 해 주길 잘했어. 내가 조금 손해 보길 잘했어. 이렇게 말이다. 기쁜 말은 <낄낄낄>인가?
왼팔로는 절대로,
왼팔을 씻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오른팔도 오른팔을 씻길 순 없겠지. 왼팔이나 오른팔이 아무리 성장한들 스스로 자신을 씻을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깨달았으면 좋겠다. 진정한 성장이란 사회의 소외계층과 취약계층을 품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라는 조셉 스티글리츠의 말처럼, 한 나라가 성장한다는 의미는 산술적인 경제성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성장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 세상을 얼마나 보듬고 있는지. 세상과 사람들에게 얼마나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