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섦에 대한 용기
우리는 이곳에 살면서 늘 저곳을 꿈꾼다. 그러니까 여행에의 꿈은 실은 저 미지의 것을 취하려는 욕망이다. 여행은 정주에 대한 반항이다. 여행은 익숙한 것, 그래서 이미 끝없는 반복으로 관습이 되어 굳어진 것들에 대한 이의제기다. 여행자들은 편함이 아니라 불편한 모험을, 익숙한 질서가 아니라 낯선 혼란을 선택한 사람이다. (장석주, "그 많은 느림은 다 어디로 갔을까" 중)
나도 그렇다.
이곳에 있으면서 늘 저곳을 꿈꾸고 있다. 마치 국어시간에 수학책 펴 놓고 영어단어 외우던 학창 시절 같다. 결국 국어도 수학도 영어도 다 꽝이었다. 이제는 일하면서 쉴 궁리를 하고, 쉬면서는 일 생각을 한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할 걸 안다. 그렇지만 꿈꾸는 저곳을 마음에서 지우기는 싫다. 그것마저 없어지면 무슨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도 그러고 싶다. 그냥 이곳에서 이곳의 꿈을 꾸고 싶다. 누구나 그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이곳 생활이 관습처럼 굳어진 사람들은 이곳에서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꿈은 이루어지면 꿈이 아니게 된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만 꿈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이곳을 꿈꾸는 것은 애초부터 예비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관습으로 굳어진 이곳을 떠나 저곳을 꿈꾸는 일, 그 자체가 하나의 여행이라 생각한다. 그 상상만으로도 나는 여행 전야의 흥분을 느낀다. 이곳과는 다른 삶, 지금까지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낯선 삶을 동경하며, 떨리는 손으로 여행가방을 꾸린다. 아, 만약 이곳을 저곳처럼 만들어도 여행을 꿈꿀까? 분명 그럴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을 꿈꾸고, 저곳에서 이곳을 꿈꿀 테니까.
가끔,
다 버려두고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냥 정해진 어디도 없이 훌쩍 떠돌다 오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내가 떠나면, 여기 있던 것들 다 떠날까 봐, 혹시 어쩔 줄 몰라하다 모두 가버릴까 봐 망설이게 된다. 그러다 미친 척 용기 내어, 아니 잠시 미쳐서 훌쩍 떠났다... 가 돌아오면. 흥! 폐허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더 잘 돌아가는 공장 소리에 놀라게 된다.
그래 착각이다. 나 아니면 기계가 멈추고 공장 문 닫을 거라는 걱정, 나 없으면 업무가 마비될 거라는 걱정, 아니 돌아가긴 하겠지만 삐걱삐걱 심각한 어려움을 겪을 거라는 우려는 나만의 착각이었다. 나는 하나의 작은 나사일 뿐이다.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규격화된 부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걱정 말고 여행을 다녀오시라. 여행은 내가 무엇을 버리고 떠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버리려 떠나는 것도 아니다.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내가 떠나는 것뿐이다.
요즘 부쩍,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을 느낀다. 이제 와서 갈림길 앞에서의 그 선택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갔던 길에 대하여 미련도 없으니. 그러면 그리움인가? 아니 그리움은 아닐 것이다. 경험하지 않았으므로 그리워할 어떤 것도 없을 테니까. 이제는 경험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익숙한 길보다 낯설고 두려운 길, 그렇지만 가슴 떨리는 길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알레르기 때문에 기피했던 복숭아와 이유 없이 거부했던 음식도 먹어 보고. 친숙한 사람보다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 더 기대를 하고. 숙련된 오른손 대신 서투른 왼손에게 일을 맡기고. 편안한 잠자리를 벗어나 노숙인지 차박인지 모를 방랑을 하고. 그리고 처음 보는 생경한 풍경 앞에서 격하게 놀라도 보고. 여러 낯섦에 대한 용의가 생겼다는 말이다. 낯섦을 꿈꾸는 여행에 비로소 눈을 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