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몹시 배가 고팠다. 그는 일곱 개의 떡을 사가지고 와서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여섯 개의 떡을 먹은 후 나머지 떡의 반을 먹자 배가 불렀다. 그는 유감스럽다는 듯이 손으로 배를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배가 부르게 된 것은 이 마지막에 있는 반 개의 떡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앞에 먹은 여섯 개는 쓸데없이 먹은 것이 아닌가? 이 반 개를 먹어 배가 부르리라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처음부터 이것을 먹었을 것인데..."
그는 못내 아쉬워하였다.
이명수 작가의 <불교우화>에 나오는 '반 개의 떡'이란 이야기다. 아무리 찾아도 떡 사진을 못 찾았다. 떡도 분명히 찍었을 텐데. 그래서 단팥빵으로 대체했다. 흠, 단팥빵이 좋아지는 때가 오면 생각이 많아지고 알게 되는 것이 많아진다.
'반 개의 떡' 이야기도 그렇다. 저런 교만한 착각은 살면서 종종 겪는 일이다. 경기에서 최선을 다한 여섯 개의 떡은 잊히고 메달을 딴 반 개의 떡만 조명을 받는 것처럼. 혹시 힘들게 준비하고 발로 뛴 직원들의 공을 챙겨 먹는 반 쪽짜리 관리자는 아닌지. 열매를 보면 떨어진 꽃잎을 생각하자.
석공이 바위를 가른 것은 마지막 100번째 일격 때문이 아닐 것이다. 최선을 다한 아흔아홉 번의 망치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침내 물을 끓이는 마지막 100도씨만 우대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제 힘껏 몸을 태워 끓기 직전까지 온도를 올려놓은 99도씨 이하 모든 노력들이 홀대받지 않는 사회, 아흔아홉 번의 외로운 망치질이 대접받는 사회를 소망한다.
아이들이 자라면 잘난 사람보다, 똑똑한 사람보다,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따뜻한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