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로 걷기 좋은 명사십리해변으로 차박을 갔다. 먹을 것을 들고 있지도 않았는데, 고양이가 반갑게 뛰어왔다. 그냥 자기를 불러주는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 고양이에겐 밥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가끔은, 누군가의 부름에 일일이 응답하는 것이 피곤한 일이 되기도 할 것이다. 가족들의 부름에서 해방되고 싶은 아내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낯선 곳이 이내 낯설지 않은 곳이 되고, 또 누군가의 부름이 거기에 도착하게 되면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부르고,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공존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인간은 공존의 본능 때문에 누군가를 찾는다는 것을. 내 안에 누군가를 들이고 싶고, 누군가의 속에 있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그랬다. 어쩌다 네가 나를 나갔을 때, 온몸으로 확산되는 그 부재의 허전함이 너무 싫었다. 어디에도 나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누가 부르면 냉큼 달려가야 하는 거라고 말한다. 이것저것 재다가 가지 않으면 아무도 부르지 않게 될 거라고. 아직 나를 불러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고.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가 이런 말을 했다.
"작곡가가 종이 위에 곡을 쓰고 나서 그 종이를 서랍에 넣습니다. 그 음악은 존재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려면 그 음악을 연주할 사람에게 줘야 합니다. 이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음악을 들을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음악 예술에만 속하는 극적인 이행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묶어줄 기적을 필요로 합니다."
기억해야 한다, 음악과 마찬가지로 '나'의 존재도, 나 혼자서는 결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나를 불러주는 사람이 있고, 나를 보고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비로소 내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잘것없는 나를 아름다운 음악으로 연주해 주는 사람들의 고마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