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시간이 아주 많은 사람들을 청춘이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하도 많아서 남은 시간 같은 것은 따져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진짜 젊은 사람들이죠. 그래서 어떤 일에 자신의 전부를 걸 수도 있어요.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중)
과연,
많다는 것이 남은 시간일까, 남는 시간일까. 시간이 많아도 쓰지 못한다면 많은 게 아닐 것이다. 쓰더라도 나를 위해 쓰지 못한다면 그 역시 많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은 시간과 남는 시간을 구별 짓는 건 무의미할 것이다. 결국 내가 날 위해 쓰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 청춘인 것이다. 나는 과연 청춘의 시절을 살고 있는지.
나이 든 청춘들을 생각한다.
나도 늙은 소년이며 나이 든 청춘에 근접하고 있기에. 나이 든 청춘에겐 남은 시간과 남는 시간이 많다. 나의 시간도 많으며, 온전히 나를 위해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바야흐로 나이 든 청춘들의 시대가 오고 있다. '액티브 시니어'라고 불리는 그들이, 그것도 700만 명 이상이나. 삶에 대한 의지와 생존 역량이 높은 그들이 청춘에 재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들은 어떤 일에 자신의 전부를 걸려고 할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아프리카에서는 갓난아이의 죽음보다 노인의 죽음을 더 슬퍼한다고. 노인은 많은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부족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갓난아이는 세상을 경험해 보지 않아서 자기의 죽음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또 유럽에서는 갓난아이의 죽음을 더 슬퍼한다고. 살았더라면 훌륭한 일을 해냈을 아이의 죽음을 더 안타까워한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노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노인은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초고령사회를 목전에 둔 지금,
저출산 문제는 신경 쓰면서 고령화문제에는 다소 둔감하지 않은지. 태어나지 않는 아이들을 기다리는 일에 매달려 사라지지 않는 노인들을 보듬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노인은 어떻게 노인이 되었는지 생각하자. 그 험난하고 고달픈 나날을 어떻게 지나올 수 있었는지를. 나이가 들면서도 어떻게 청춘으로 행세할 수 있었는지를. 나도 저들처럼 자몽색 꿈을 향해 자신의 전부를 걸어보면 어떨지를. 그리고 멀어지는 방식으로 오래 쳐다보는 소멸은 어떤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