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는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시간도 있지만, 충분히 만족스럽고 또한 완벽한 순간도 있다. 그 순간은 그냥 주어지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내가 만들어낼 수 있다. (김은주, '나라는 식물을 키워보기로 했다' 중)
작은 텃밭이 생긴 후로 아내가 밝아졌다.
"저것 좀 봐요, 튤립이 모두 살았어요!"
"너무 예쁘지 않아요?"
"나는 여기만 오면 살 것 같아요. 얘네들 보고만 있는데도 시간이 너무 빨리 가 아쉬워요."
"그냥 여기 계속 있고 싶어요. 집은 답답해서 돌아가기 싫어요."
텃밭에서는 집에서와 달리 생기 도는 얼굴로 깔깔대며 재미있어한다. 이른 봄, 튤립 구근 20개를 구해와 텃밭상자에 심더니 20개 모두 싹을 틔워 냈다. 채소 키우라고, 튼튼한 스프러스 구조목으로 큰 텃밭상자 2개를 만들어 주었더니, 채소보다 꽃을 먼저 심었다. 그리고는 소녀처럼 저리 좋아한다. 끙끙대며 개비온(gabion)에 돌을 채워 번듯한 돌담을 완성하더니, 마당에서 밭으로 내려가는 돌계단도 그럴싸하게 만들어 낸다. 자기는 전생에 석공이었을 것이라 털어놓는 아내의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제는 아내가 가시로 찌르지 않는다.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사람밖에 없다고 했던가. 그 상처에 대항하여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식물처럼 가시를 만드는 것이다. 이대로는 못 살겠다, 나도 좀 살자는 생존의 절규가 가시로 표출되는 것이다.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자꾸만 가시처럼 찌르는 사람이 있다. 방어 차원이 아니라 공격적으로 찔러오는 사람이. 그런 사람일수록 더 애정을 갖고 살펴야 한다. 내게는 아무렇지 않은 사소한 일이지만, 그 사람에게는 견디기 힘들 만큼 서러운 상실일 수 있으니. 그 사람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가시를 만든 것이다. 가시는 신경의 돌출부인 까닭에, 찔린 사람보다 찌른 사람이 더 아프다. 크게 아프기 전 아내가 그랬다. 사사건건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공격으로 일관했다. 우리는 가시에 찔리며, 찌르며 마음이 너무 아파 함께 울었다. 그랬었다, 우리에게 작은 텃밭이 생기기 전에는.
밭일의 원칙이 기운을 찾아 주었다.
아내는 삽을 들고 밭으로 가 땅을 뒤엎을 때, 환희와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자기 손으로 직접 식물들을 가꾸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무엇을 바라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그 무엇을 하는 것, 이것이 아내에게 웃음을 찾아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할 때, 그 기대에 상응하는 무엇을 받지 못할 때, 실망하고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식물을 사랑하는 일은 그렇지 않았다. '밭일의 원칙'에 따라서 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뿌린 만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1841년, 랄프 왈도 에머슨이 '개혁자로서의 인간'에서 얘기한 것으로, 세상의 일과 항상 1차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밭일에 있어서, 자기의 손으로 직접 식물을 가꾸어야 하며, 남을 부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건 2차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1차적인 관계에 있는 일은 기쁨과 건강을 동반하는 것 같다. 채집과 농경생활을 하던 원시인 중에 비만인 사람과 우울한 사람이 있었던가? 우유를 받아먹는 사람보다,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사람이 사람을 부리기 시작하고, 2차, 3차적인 관계로 살게 되면서부터 아픈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몇 푼의 돈과 얄팍한 지식, 조금 이른 경험, 자기들끼리 동의한 계급 등을 내세워 자기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순간, 기쁨과 건강도 그 사람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남는 것은 게으름뿐이다. 몸과 마음의 병은 게으름을 자란다는 것을 명심하자. 시키는 걸 좋아하지 말자.
식물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면, 식물을 좋아하게 된다고 한다. 사람이 식물에게 쏟은 관심과 애정만큼 식물은 사람에게 기쁨을 돌려준다. 식물이든 사람이든 관심을 받지 못하면 시드는 것은 같지만, 피드백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물과 거름은 관계의 수단일 뿐이고, 사실은 관심이 식물의 성장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한다. 사무실에서 집으로 가져가기만 하면, 시드는 축하 화분도 알고 보면 나의 무관심 탓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빛나던 화분도, 내가 그의 존재를 잊어버리면 시들다 말라 버리는 것이다. 식물은 사람을 속이지 않았지만, 사람이 식물을 속인 것이다.
식물이 사람을 가꾼다.
어쩌면, 사람은 식물로 태어나 동물로 살다가 식물이 되어 죽는 건지 모른다. 우리가 식물을 가꾸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식물이 우리를 키워내고 있는 건지 모른다. 우리는 식물에게 움직이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수많은 움직이는 것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그 깊은 뿌리내림을 배워야 한다. 사람이 두 발로 걷는 이유는 자기의 자리, 서 있을 곳을 찾아가기 위해서이다. 나는 내 설 곳을 찾았는지 묻는다. 그리하여 식물처럼 뿌리내리고 성장하며 살고 있는지, 아직도 자리를 찾아 바쁘게 떠도는 중인지, 아니면 내 자리가 아닌 곳에 뿌리를 잘못 내리고 있지 않은지, 내게 묻는다. 그리고 어쩌면 아내가 키운 것이 식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딸 그림, 생명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