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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뚜 Oct 19. 2022

반짝이는 날

가을도 본격적으로 시작된 모양입니다. 날은 참으로 밝고 세상은 온통 반짝이는 그런 날 입니다.


몰아치듯 바빴던 사무실 일이 대충 정리되고 이주간의 정신없던 업무가 얼추 마무리 되었습니다. 아들의 얼굴이 낯설어 보일 만큼 한가지에 몰입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수업시간이 늦었다며 모처럼의 휴식을 방해하는 아들에게 날카롭게 거절을 하다가 마음을 돌렸습니다. 학교까지 가는 길에 하고 싶던 얘기도 좀 해봐야겠고 모럼 엄마에게 손 내민 아들이 짠한 생각도 들었던 까닭에 키를 챙겨들고 집을 나섭니다. 세상이 반짝이는 이런 날, 침대에서 온종일 뒹굴뻔 했습니다. 참 날이 좋은 가을의 어느 평온한 날입니다.


등교 준비를 하는 아들을 기다리며 바보상자에 시선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외국인이 한국에 여행와 한강 유람선을 타며 들떠 있군요. 그 장면에서 문득 상해에서 야경투어를 하며 유람선을 탔던 그때가 생각났습니다. 남편의 흥분한 표정과 상기된 얼굴이 기억납니다. 평소 보기 쉽지 않은 모습이라 뇌리에 박힌 찰라의 순간입니다. 남편은 얼굴 표정이 다양한 사람이 아니라 웃는 모습도 잘 보기 어려운 까닭에 그때의 흥분한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이 참 행복했습니다. 그때가 생각나면 연속극의 다음 편처럼 함께 기억나는 일도 있습니다. 아들과 파리의 세느강에서 유람선의 의자에 앉아 무릎담요를 어깨까지 두르고 벌벌 떨리는 손을 겨드랑이에 끼워 체온을 올리며 눈동자만 뱅글뱅글 돌리던 그 모습입니다. 직장에서 장시간의 휴가를 낼수 없던 까닭에 남편만 남겨두고 아들과 둘이 떠나온 여행이었습니다.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주면 잘 놀다 오라고 행복해 보인다고 다음에는 꼭 함께 가자고 말하던 남편이 참 든든했습니다. 예뻐도 너무 예쁜 파리의 밤은 옆에 함께 한 아들도 좋았지만, 남편과 함께였으면 정말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그때도 남편의 부재는 속상한 일이었습니다. 다음에는 꼭 함께 와야겠다고 혼자서 열심히 다짐했습니다. 상해의 밤처럼 활짝 웃던 남편이, 상기된 그의 볼이 파리의 세느강에서도 보여줄 그의 미소가 그려져 혼자 상상만으로도 행복했지요. 그래서 상해와 파리는 내게 한 묶음의 패키지였습니다. 바보상자를 보며 이미 지킬 수 없게 된 약속을 그래서 더이상 볼 수 없게 된 남편의 미소를 그리워하며 울컥하다가 아이와 집을 나섰습니다.


학교로 가는 길, 나는 꼰대였습니다. 모처럼 아들과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 짧은 거리에 끝도 없는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아들은 묵언 수행에 돌입했습니다. 결국 아들의 목소리는 차에서 내리며 "다녀올께." 하는 한 마디가 끝이더군요. 차를 돌리며 아뿔싸하는 마음에 속이 상했습니다. 길은 여전히 반짝이고 가로수가 어느새 옷을 갈아 입기 시작했습니다. 노란 잎이 반짝이는 옆에서 검붉은 잎이 존재를 알리고 있네요. 빛을 받아 반짝이는 붉은 잎이 오히려 애처러워 보였습니다. 예쁘기도 참 지랄맞게 예쁘네요. 그래서 또 또르르 눈물이 납니다. 매년 가을마다 조수석에서 가로수를 보며 흥분하던 나는 남편의 변화없는 표정이 오히려 더 신기해 쪼잘거렸고 어떤 때는 어찌 그리도 감정이 없냐며 타박을 하기도 했었지요. 그런 토닥거림과 나의 타박을 은근히 즐기던 그 남자도 없이 오늘은 혼자 운전 중입니다. 도로에 집중하던 눈동자를 잠깐씩 굴려 가로수를 바라봅니다. 그 아래 예쁘게 빨간 물이 들어가는 담쟁이 덩쿨이 보이네요. 매년 그곳에서 자리를 지키는 담쟁이가 문득 오늘 눈에 들어 왔네요. 몇년 전에도 재잘거리며 남편 옆에서 예쁘다고 소리치던 그 담쟁이가 올해도 여전히 예쁘게 반짝입니다. 가을 햇살을 잔득 머금은 모습이 눈이 부시네요.


더럽게 예쁘고 반짝이는 가을의 평온한 어느 날입니다. 다 그대로인데 모든 것이 그대로 다시 돌아오는그 가을 그대로인데 2년 전 이맘 때, 응급실 앞에서 눈을 감아버린 그 사람은 돌아 올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여전히 부재 중인 그가 남겨둔 삶 속에서 혼자 남은 나는 바보상자를 보다가도 길가의 가로수를 보다가도 그가 생각납니다. 그래서 더 지랄맞게 예쁘고 반짝이는 어느 가을 날입니다.


숨막히게 예뻐서 반짝반짝한 어느 가을 날,

그 길을 달리는 차안에서 누군가 짠 듯이 흘러나오는 노래에 결국 주루륵 눈에서 물이 쏟아집니다. 참 예뻐서, 욕이 나올 만큼 예뻐서, 반짝이는 빛이 눈이 부셔서 슬픈 그런 날입니다.


'내게 가르쳐준건 사랑뿐 이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냥 이렇게 울면 되는지

너를 미워해야 하는지

흐르는 눈물 닦지 않았지'

  <신승훈, 널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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