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입니다.
오랜 병마와 싸우다 결국 함께 가는 길을 택한 지구인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출퇴근길,
드문드문 보이는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포스터와 현수막이 붉습니다.
포스터의 달집,
그것을 잡아먹으며 화려하게 출렁이던 불꽃과 그날의 향기가 떠오릅니다. 수년전 참석했던 달집태우기 행사장에서 너울거리는 대형 달집을 바라보며 남편과 손을 잡고 불멍 삼매경에 빠졌던 때 모습입니다. 그때는 그냥 즐거운 축제 참석에 그쳤던 경험이었습니다. 예쁘면서도 두려운 붉은 색이 너울거리는데 꼭 세상을 삼켜버릴거 같아 두려운 마음도 들었던 거 같습니다. 타오르던 달집 앞에서 사람이 참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여 신기하기도 했던 그날이 떠오릅니다. 평소와는 사뭇다른 경험이었습니다.
한해의 시작,
두가지의 행사가 기다립니다. 새해 아침 일출을 보기 위해 밤길을 달려 해돋이를 보며 소원을 빌던 이벤트를 좋아하는 우리가족은 대보름날 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비는 것도 작은 행사였습니다. 물론,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목을 주욱 빼고 바라보았지요. 일상의 무게가 여간해서 시간을 주지 않는 대보름날이었으니까요.
정월 대보름,
올해도 어김없이 그 밤이 찾아왔습니다. 베란다에 나갑니다. 이번에는 혼자서.
고고하면서도 적막하더군요. 보름달은 어딘가 비밀을 간직한 듯 보이고 그 침묵의 무게가 무겁게 가라앉아 신비스럽습니다. 이런 모습에 두려움이 밀려들기도 하더군요. 유별나게도 오늘밤의 저 달은 더 크고 둥글어 보입니다. 신기하게도 쳐다보기만 했는데, 마치 내 심장의 구멍과 연결되어 있는 듯이 느껴지내요. 마치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을 숨기고 있는듯 보입니다. 시선을 잡아채곤 놓지를 않네요.
문득,
소란하던 머릿속이 맑아지며 고요해지더니 생각자리에 공터가 생깁니다. 드디어는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갑니다. 옛날에 고무동력기가 기억나시나요? 고무동력기를 날리려면 고무줄이 연결되어 있는 프로펠러를 수십번 돌려 감아서 원하는 방향으로 비행기 머리를 향하고 손을 놓지요. 그러면 돌린 만큼의 힘으로 고무줄이 풀리며 앞으로 날아갑니다. 그 간단한 원리가 생각나며 상상은 엉뚱한 곳으로 나아 갑니다. 고무동력기를 아주 크게 만드는 겁니다. 성인의 무게를 감당할 만큼 크고 힘이 좋은 동력기와 고무줄이 필요합니다. 그 비행기에 내 몸을 꽁꽁 묶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힘껏 날아 오르는 거지요. 그렇게 날아올라 저 달이 만들어낸 커다란 구멍을 통해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두사람을 만나러 가는 겁니다. 달이 만들어낸 커다란 문을 통과하면 주어진 삶을 마치고 쉬러 간 그 사람들의 쉼터에 닿을 것만 같아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네요. 큰 발견이라도 한듯이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몇시간 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갈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들의 손을 마음껏 쓸어 주고 싶습니다. 손바닥을 마주포개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싶습니다. 비록 현실은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습니다.
두쌍의 손.
나를 많이 사랑해 주었던 두 사람, 그들을 생각하면 유독 떠오르는 손.
한쌍은 뼈마디가 앙상했었고 주름투성이에 온통 풀물이 들어있던 외할머니의 손입니다. 그 손 끝의 풀물은 봄이면 산으로 강으로 다니며 봄나물을 캐느라 물들었고 건조하여 쩍쩍 갈라진 손끝이 볼때마다 아파보여 마음이 쓰였던 손입니다. 또 다른 한쌍의 손은 언제나 내 옆에 앉아 머리를 쓸어주거나 등을 두드리던 부드러운 손, 중환자실에서 퉁퉁부어 경직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희고 부드럽던 남편의 손입니다. 그 손들이 그리워 울던 날이 꽤 되는군요. 하필 손이 그립네요. 나는 아마도 손에 페티시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두쌍의 손을 한쪽씩 잡고 날이 밝기 전까지 함께 있고 싶습니다. 상상만 해도 좋네요.
달을 보며,
지금 이 시간, 이제 막 해가 저물고 사방이 컴컴해지기 시작한 이 시간, 내가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이 시간에 오랜만에 달집이 타오르는 불꽃의 화려함에 넋을 놓고 즐기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오늘도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하겠지요. 바라보고 만지는 일련의 행동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들은 알까요?
다시 베란다에 서서, 상상은 일년에 딱 한번이면 족하다고 나를 다독입니다.
오늘은,
일년에 한번 뿐인 정월 대보름입니다. 남편이 놓치지않고 소원을 빌던 날입니다.
달이 유난히 크고 서늘한 오늘 밤만 그립고 아프다 말까 합니다. 그렇게 소원을 빕니다.
그리고 내일은,
일상으로 돌아가 가끔만 그리워하고 가끔만 추억하며 아프지 않게 지낼까 합니다. 마음먹은 대로 그대로 이루어지길 소원합니다.
저 너머에는,
보름달이 만들어낸 블랙홀 저 너머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거 같아 잠깐 행복한 상상을 했습니다. 그러다 달콤한 상상에서 깨어납니다. 이제 이쪽에서 여전히 나와 함께하며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들과의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손에 페티시가 있는 나는 아들의 손을 만져봐야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감각을 깨울 시간입니다. 걸음을 옮깁니다. 아직은 잡아줘야 하는 손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춥고 싸늘하기만 하던 베란다의 공기와 아팠던 마음을 환한 불빛과 훈기로 거실이 위로를 보내는군요.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던 아들의 길고 가는 손가락을 잡습니다. 아들이 나를 보며 빙긋이 웃네요. 손가락을 만지니 심장이 따뜻해 집니다. 아직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네요. 다행입니다. 이 길이 나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