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한 시간을 죽이기에는 텔레비전이 좋다. 생각 없이 시선을 고정하면 시간은 저절로 흘러간다. 눈과 귀가 소란하니 외롭지 않다. 오늘도 나는 혼자 시간 죽이기에 돌입한다. 손은 습관적으로 채널을 돌리고 뇌는 정지된다. 바쁜 손가락은 버튼을 올렸다 내렸다 익숙한 운동에 여념이 없다. ‘저건 본 거, 저건 재미없고, 저건 슬퍼서 안 볼래.’ 손가락과 마음의 대화는 끊임없다. 의미 없는 시간을 되풀이한다. 바쁘게 지낸 나에게 주는 휴식 같은 이런 시간을 좋아한다.
익숙한 화면과 익숙한 목소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인다. 새로운 것을 찾는 눈이 바쁘다. 오늘은 화면 사이에 새로운 것이 포착되었다. 낯선 드라마에서는 죽음을 앞둔 아내를 위해 남은 시간 추억 만들기 여행을 준비하는 가장의 노력을 다소 어두운 분위기로 묘사 중이다. 현실 같은 드라마라는 생각이 들었고 사람의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서 눈이 간다. 손가락을 멈춘다. 안타깝게도 아내를 잃고 홀로 남은 남편이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물론 여행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설정이 예고된다. 슬픔과 원망, 후회가 공존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드라마를 나는 잘 보지 않는다. 감정이입을 잘하는 편이라, 우울한 분위기는 멀리하고자 노력한다. 멍하게 시간 죽이기를 하던 나는 생각 없이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되는 슬픔은 머리를 비워둔 만큼 빠른 속도로 빠져든다. 나는 저들의 감정을 공유한다. 머리 식히기가 변질되는 나쁜 예이다.
그때는 참 많이 억울했다. 말 한 번 섞어보지 못하고 쓰러진 남편의 귀에 미안하다고 사과만 하다 보냈다. 오직 한가지 감정만이 지배했다. 그리고 수년 동안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주어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눈을 보고 사과하고 눈을 보고 사랑을 고백하는 그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매번 생각의 끝은 억울했고 미안했다. 대상을 정하지 못한 원망의 화살은 돌아 돌아 내 심장에 꽂혔다. 반성이란 용서해 줄 대상이 있을 때나 효력이 있는 것이다. 용서를 빌어도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 결론이 나지 않는 후회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도 무뎌지지 않는 원망과 후회를 안고 살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후회의 늪에 빠져 삶을 갉아먹을 거라 여겼다. 꽤 긴 시간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했다.
사실 조금만 들여다보고 깊이 생각해 보면 나를 잠식한 미련은 모두 거짓이다. 그와의 시간이 조금 더 주어졌더라면 내가 정말 용서를 빌고 사랑을 고백하고 남은 시간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수 있었을까? 나는 살아남아야만 하는데 과연 가능했을까? 절망감만 가득한 미래를 준비하느라 그와의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었을까? 그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과정은 아마도 살아 남아야 할 우리를 위한 준비 시간이지 않았을까 싶다. 아픈 그를 두고 기나긴 경제 토론을 했겠지. 무엇이 얼마나 있고 어디에 있는지를 꼬치꼬치 캐묻고 따지느라 바빴을 것이다. 그리고 두려웠겠지. 혼자 남겨진다는 두려움에 그를 살필 겨를은 없었을 것이다. 힘들었을 그를 배려하기보다 내 앞날이 무서워 그의 두려움을 방관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지독히 이기적인 그런 사람. 그러니 이별의 시간을 주지 않았다는 원망이 무슨 소용인가.
드라마에서 딸이 엄마를 원망한다. 자신의 죄책감을 원망으로 풀어낸다. 딸을 만나러 가던 길에 사고가 난 엄마는 다리를 절단하고 누웠다. 그리고 드라마는 엄마의 죽음과 함께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들은 누나에게 이기적이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 속 아픔이 너무 절절해 먹먹해졌다. 아직 초반부라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예고를 보면 사랑을 잃고 다른 사랑으로 극복하는 이야기인 듯하다. 딸은 이기적이다. 가족의 슬픔에도 고통을 회피하고자 도망친 그녀는 이기적이다. 혼자 웅크리고 아파하는 그녀를 보며 생각한다. 나도 그녀처럼 이기적이다. 원망을 방패 삼아 이기적으로 문제를 회피한다.
오늘 나는 슬픈 드라마를 보았다. 짧게 스친 이야기의 잔상이 꽤 오래 남는다. 아마도 슬픔을 겹겹이 두른 인간사이기 때문이겠지. 이입된 감정은 오래 여운을 남긴다. 이제 이 드라마는 더 이상 보지 않을 것이다. 뇌가 깨어났으니 슬픔을 보류시킨다. 굳이 슬픔에 노출될 필요는 없다. 결말이 궁금하지도 않다.
젠장, 좋아하는 멍때리기 휴식기에 어처구니없는 덫에 걸렸다. 남의 슬픔을 내 슬픔과 교차시키며 감정을 물들인다. 그래서 이기적인 나는 감정을 무디게 하려고 다시 멍때리기를 시도한다. 채널을 넘긴다. 빠른 속도로 화면이 변한다. 이러다 보면 다시 뇌가 흐물흐물해 질 거야. 다시 손가락의 규칙적인 운동이 시작된다. 눈에 힘을 풀고 초점을 없앤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빠르게 지나간다. 슬픈 이야기가 밀려간다. 되었다. 정답이다. 머리를 멈추고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이런 방법은 생각을 멈추고, 마음이 멈추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의 그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찾아온 슬픔은 어떤 방법으로든 벗어나면 된다. 이기적인 나는 오래 슬퍼하지 않는 방법으로, 결국 회피라는 단어에서 찾는다. 원망이라는 감정에 숨어서. 그 드라마의 딸처럼 이기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