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참 예쁘게 내리는 주말이다.
피곤에 절어 잠이 들 때는 눈만 감으면 모든 것이 잊히고 깊은 수면에 빠진다. 물론 새벽에 눈을 뜨면 다시 밀려드는 온갖 기억에 소스라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5시간 정도는 모든 것을 잊으니 잠이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싶다.
오랜만에 밤잠을 설쳤다.
낮에 마신 커피의 영향일까? 한창 사진이나 영상 작업을 할 때는 커피를 하루에 7~8잔씩 마셔도 잠만 잘 잤는데 어제 마신 커피 두 잔에 맥 없이 무너졌다. 이리저리 뒤척여 보다가 눈을 뜨면 그의 생각이 성큼 다가온다. 잊고 싶어 눈을 감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다. 혹시 다시 불면증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불을 끄고 누웠으니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방에서 애써 눈을 감고 있지만 쉽지는 않다. 그렇게 새벽 4시까지 시간을 보냈다. 눈 감으면 맑아지는 머리 때문에 고통이었고, 눈 뜨면 환상처럼 다가오는 남편이 생각나 긴 시간을 뒤척였다. 결국, 늦은 쪽잠 후 개운치 않은 정신으로 아침을 맞았다. 아들을 깨우고 밖을 보니 촉촉하다. 산에는 어제 미처 보지 못했던 단풍이 물들어 있고 은행나무도 노란 옷으로 갈아입었다. 계절이 변하고 있다. 늦여름 더위에도 오리털 이불을 덮고 온몸을 떨며 춥다고 했던, 그날 밤의 그가 떠 오른다. 가을이 깊어 가고 곧 겨울이 오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 올 텐데 그는 여전히 추워하고 있을까? 아니면 촉촉히 젖은 먼 산을 바라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40km나 떨어져 있는 그와 나의 거리가 안타깝다. 보고 싶을 때 슈퍼에 가듯 달려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창밖의 비에 세상은 고요한데 내 마음은 소란하기만 하다.
아들을 깨우기 위해 방을 들락거리기를 수십 번, 결국 아들은 선생님께 전화를 걸고 오후에 학원에 가겠다고 한다. 아빠가 있었다면 시끄러워졌을 상황을 만드는 아들에게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너, 아빠 없다고 엄마 무시하니? 그렇게 엉망으로 살 거야?" 말도 안 되는 어깃장을 부리며 나도 기가 막혔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서 욕실로 향하는 아들을 보며 '내가 미쳤구나. 남편이 봤으면 화를 냈겠구나.' 40킬로 떨어진 거리가 오늘은 다행이다 싶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아들이 마음 상했을까 눈치를 본다. 아빠만큼이나 마음을 읽기 힘든 포커페이스의 표정에 주눅 든 나는 아들 눈치를 자꾸만 본다.
벌떡 일어나 욕실로 갔던 아들은 내 기대와는 달리 선생님께 전화를 하고 학원 시간을 늦추었다. 남편과 똑같다. 성격은 나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이런 일이 생기면 아들에게서 남편이 보인다. 매사에 져 주는 것 같아도 결국 자기 뜻대로 했던 남편이 아들에게 그 성격을 그대로 물려주고 떠났다. 이기지도 못할 것을 기운만 빼고 마음만 상했다. 부질없다. 나의 판박이라 생각했던 아들이 한번씩 이런 아빠의 모습을 보여 주면 '아! 그의 아들이구나.' 하는 자각을 한다. 붕어빵 부자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아들 친구의 엄마가 얘기한 적이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편을 아파트 입구에서 봤는데 단박에 알아보겠더란다. "Big ○○ 이 지나가는 걸 봤다." 며 신기해했다.
아들은 남편과 붕어빵처럼 닮았다. 외모도 그렇지만 고집 센 성격도 그렇다. 붕어빵 부자는 내가 감당하기 벅차다. 고집이 쇠심줄이다. 어쨌든 말도 없이, 표정 변화도 없이 부리는 고집 때문에 매번 나만 이상한 여자가 된다. 저렇게 잘 해 주고 부드러운 사람이 고집이 어디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그래서 나는 영 불리하다. 아들도 그렇다. 심지어 아빠가 부재중인 상태에서의 아들은 더 쇠심줄이 되어 있다. 이렇게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나에게는 너무도 버거운 사람이 된다. 그래도 대부분 그들은 나에게 달달하고 속이 든든해지는 붕어빵같은 사람들이다. 맛있고 찐한 팥이 일품인 길거리 음식 말이다.
날씨가 쌀쌀해지니 붕어빵이 먹고 싶다. 이맘때쯤 낙엽이 고와지면 붕어빵 장사가 거리로 나오고 퇴근하는 남편이 현관문 앞에서 붕어빵 봉지를 내밀곤 했었는데. 내가 한 입 베어 무는 모습을 보며 눈가에 웃음을 달고 쳐다보던 그가 생각이 났다. 남편은 칭찬받고 싶어서 꼬리를 흔드는 댕댕이처럼 눈을 빛내며 칭찬을 기다렸다.
아들과의 다툼으로 지친 나는 똑 닮은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아들과 싸우면 백전백패 당하던 착한 남자, 그는 그 착한 성품 속 어디에 고래 쇠심줄을 숨겨 두었던 걸까? 대부분은 져 주었지만, 큰 일에는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었지. 그래서 내가 이만큼이라도 누리며 살았지 싶다. 그의 쇠심줄 덕분에. 아들의 쇠심줄도 그 정도의 역할은 해 줄 날이 오긴 올까?
"오늘은 당신도 붕어빵 생각나겠다. 그치? 딱 붕어빵 먹기 좋은 날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