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이 익숙하지 않다. 특히 나의 거절이 다른 사람의 기대까지 무너트린다면 더욱 그렇다. 내가 싫어도 나만 참으면 모두가 즐거울 것을 아는 까닭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제일 만만한 남편을 거절한다. 남편이 그렇게 싫어하는 저녁 외출을 하게 될 일이 자꾸 생긴다. 집에서 좋지 않은 표정을 짓는 그들을 두고 나오기에 걱정이 되고, 나와서도 즐겁지 못하니 이중으로 죄책감이 든다. 매번 그랬다. 밖에 있으면 시간마다 전화를 거는 남편 때문에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도 어느 순간 눈치를 채고 불편해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제 나가지 말라고 할 남자가 없다. 아들은 엄마 눈치 보느라 싫어도 반대하지 못한다. 아니 엄마가 걱정되는지 웃으며 갔다 오라고 혼자 잘하고 있겠다고 말한다. 혼자 둔 아들이 못내 신경이 쓰이지만, 여전히 지인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한다. 어리지 않은 아들 걱정을 너무 한다는 그들의 비난이 듣기 싫어서이기도 하다.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아들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다 해 주던 아빠를 잃은 지 아직 두 달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까지 생각해 내지는 못할 것이기에 아들의 철 없음을 비난할까 봐 걱정된 나는 아들 핑계를 댈 수가 없다. 다들 남의 얘기가 가장 쉬운 법이니 말이다. "너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하잖아!"라는 한마디면 나는 결국 두 손 들고 그들을 만나러 간다. 아들을 두고 발걸음이 무거운데 그래도 나간다. 의무처럼, 빚 갚는 심정으로 그렇게. 사실 그들도 많이 기다려 주고 있는 까닭에 거절이 힘들다 싶을 때 외출을 하게 된다. 될 수 있으면 가족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불러내는 지인은 때로는 내 기분 전환을 이유로 때로는 너무 오래 만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절의 대답을 사전에 차단한다. 이미 알 만큼 아는 사이라 대답을 예견하고 시작된 권유는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이제 반대할 남편이 없지 않느냐는 뉴앙스의 권유는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였다.
이틀 정도 외출할 일이 생겼다. 혼자 움직이는 일은 아들이 돌아 오기 전 집에 도착할 수 있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같이 움직이는 일은 특히 그들의 차로 움직이는 일은 중간에 혼자 움직인다는 것이 곤란해진다. 이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움직이지만, 매번 그들은 다른 계획이 있고 결국 혼자 빠져나오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듯해 마지막까지 같이 하게 된다.
혼자 있을 아들이 걱정이라 마지막 스케줄을 어렵게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기분을 전환시켜 주려던 그들의 노력 덕에 즐거운 외출이었다. 일정이 계획적인 것을 좋아하지만, 오늘은 예정에 없이 외출은 길어졌고 정신없이 따라다니다 왔다. 무언가에 홀린 듯 다 잊어버리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한 그들의 배려다.
정신을 잃고 놀았나 보다. 아들과 저녁을 먹은 뒤, 소파에 앉았다. 정면으로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아차, 8시였다. 남편의 연미사를 잊어버렸다. 아니 하루종일 남편을 잊고 있었다. 의무처럼 생각하며 지켜왔던, 그를 기억하기 위한 미사를 완벽히 머리에서 삭제하고 있었다. 시계와 눈이 마주친 순간 부끄럽고 미안해서 죄책감에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겨우 이 정도의 여자였다. 나라는 여자는. 이 단순함을 남편은 좋아했었지만 나는 부끄러워 누가 눈치챌까 봐 무서울 지경이다. 오늘도 나는 후회로 하루를 보낸다. 이렇게 후회하면서도 내일 또 내 걱정으로 시작된 권유는 쉽게 거절하지 못하겠지.
나는 거절에 약한 여자다. 그래서 가끔 삶이 고단하다. 덕분에 지인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들이 귀찮을 때도 생기지만 큰일 앞에서는 힘이 되어 준다. 더욱 거절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변명일까?
남편 보내고 처음으로 이틀 밤, 한 번은 아들 입시특강을 한 번은 몇 달 만에 가진 모임에 다녀왔다. 그런데 동생이 농담을 빙자한 비난을 한다. 언니는 모임이 너무 많단다. 매일 나간다고도 했다. 언제는 집에만 있지 말라고 하더니 하루 놀고 온 나는 비난을 받았다. 물론 혼자 있는 조카가 걱정되기도 했을 테니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지인들과 밥 먹고 차 마시고 저녁 미사 드리고 돌아온 나는 아직 그것도 하면 안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제 남편 대신 다른 이들의 눈치를 봐야 되나 싶어서 그의 부재가 속상하다. 앞으로 더 많은 간섭이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겠지. 벌써 시댁에서도 연신 연락이 오고 내 행동을 컨트롤 하려고 하니 앞으로 또 어떤 제약이 있을까 상상도 되지 않는다.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간섭은 거절도 힘들어 숨이 막힌다. 그냥 둬 주면 안 될까? 내가 그렇게 엉망처럼 보이는 걸까? 친정아버지는 제일 차돌맹이 같은 녀석이 혼자 되었네 하며 속상해했었는데 왜 다들 나를 믿지 못할까 싶다.
밤 마실 나가는 걸 싫어하던 사람이지만 돌아 올 때면 잘 놀고 왔냐고 맛난 거 먹었냐고 물어 주던 내 남자가 너무나 그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