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게 아니라

by 완뚜

답답한 거였다.
온통 둘러 보아도 상대가 없었다. 그래서 였다.

남편이 떠나고 내 전화 내역은 온통 친정 식구와 지인이 차지했다. 그들은 걱정으로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일 없이 전화를 걸고 있다. 딱히 전할 말도 없지만 잘 버티고 있는지, 밥은 먹었는지, 울지는 않는지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겠거니 싶어 태연히 잘 지내는 것처럼 대답한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그들을 안심시키고 의미없는 너스레를 떨며 긴 통화를 마친다. 오히려 예전보다 말이 많아졌다. 그들은 나의 침묵을 못견뎌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화 통화의 90프로는 남편과의 대화였다. 별것도 없었다. 무언가를 사다 달라는 부탁부터 뭐 먹고 싶냐며 묻는 전화, 그리고 대부분은 투닥거리며 마치 싸우는 사람처럼 땍땍거리는 내 대답이었다. 이제야 좀 친절할 걸 싶지만 이미 떠나 버린 버스일 뿐이다.

새 직장에서는 사무업무도 많지만 전화응대도 많은 직업이다. 사무실에 앉아 같은 내용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대화로 저녁 무렵이면 목이 쉬는 일이 잦다. 그래도 괜찮았다. 한가할 여가가 없으니 오히려 좋았다.

문제는 늦게라도 퇴근은 해야 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답잖은 대화만 했던 남편은 이미 집에 없다. 아쉽지않을 줄 알았다. 적어도 집에서 대화가 많던 사이는 아니었고 그의 직장 푸념을 주로 들어주는 역할이었으니 아쉽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푸념을 풀어 내고 들어 주는 그 대화가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남편이 직장 일을 푸념하면 나는 간 크게 당장 그만두라고 당신 일 안해도 먹고 살 수 있다고 당당히 말했었다. 속으로는 정말 사표라도 내면 어쩌지 하며 간을 졸였지만 적어도 그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었다. 그러면 남편은 알면서도 속고 속상한 마음을 조금은 풀고 표정이 부드러워지곤 했었다. 마치 그에게 하는 나의 위로인 줄만 알았다. 지나고 보니 그 대화를 그리워하는 나만 혼자 남았다.

나는 지금 푸념을 들어주고 내편을 들어주고 말도 안되는 대답으로 웃겨주는 남자가 필요하다. 통화 중 내 푸념에 조목조목 따지고 잘못을 지적하는 가족들의 지독히 객관적인 대화보다 말도 안되는 무조건적인 내편으로서의 그의 너스레가 듣고 싶다. 지독히도 그립다. 그의 목소리가 그립다. 그래서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을 때 조차도 적막해서 미칠 것만 같다. 세상이 너무나 조용하다. 마치 청각을 잃은 사람 마냥 감각기관이 제멋대로 나댄다. 청각도 후각도 환상을 만들어내며 나를 시험한다. 현실인지 착각인지 구분하기를 포기한다. 그의 체향이 느껴지면 느껴지는데로, 그의 목가다듬는 소리가 안방에서 흘러나오면 흘러나오는데로 즐기기로 한다. 아파트 계단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화들짝 놀라지만 뭐 어떤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어제까지 나는 뼛속까지 시린 외로움에 아팠다. 그런데 오늘 마침내 나는 외로운 게 아니라 대화 상대의 부제로 인해 답답하다는 결론을 얻는다. 너스러 떨며 말도 안되는 대답으로 나를 웃기던 남자, 기다려보라며 말은 안했지만 너의 소원은 내가 다 이뤄 줄 거라고 신뢰성 없는 약속을 하던 그 남자, 가끔 흰머리를 뽑는다는 핑계를 대며 내 옆자리로 바짝 다가와 머리카락을 뒤적이다 흰머리 한가닥에 만원을 불러도 그대로 계산해 내 손에 쥐어주던 그가 없어서 나는 답답하다.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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