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파티. 정물.
선을 조금 달리해 그렸을 뿐인데, 배, 사과, 납작 복숭아가 턱을 걸치고 포개어 누운 곤충처럼 보인다. 말랑 말랑하고 화사하고 따뜻한 색감과, 아기 자기하고 꿈틀 대는 귀여움이다. 줄줄이 딸려 나온 감자 덩이들과 얼떨결에 섞여, 흙더미 밖으로 나동그라진채 당황스레 몸을 구부리던 살찌고 뽀얀 굼벵이 같기도 하다. 로봇 청소기를 형님 댁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과 흡사하다. 바지락 거리며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힘들다 허리 아프다 군소리도 없이 알아서 충전하고, 때가 되면 먼지가 먹잇감이라도 되는 양 삼키며 바닥을 휩쓸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도 로봇청소기하나 장만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잡다한 물건들이 많은 우리 집 특성상, 로봇청소기는 분명 여기저기 부딪쳐 상처 입기를 일쑤일 테고, 분명 짧은 생애를 마칠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저녁, 사거리 횡단보도에 서 있으면,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이 동물의 모습과 꽤나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차들은 딱정벌레나 풍뎅이와 비슷하고, 중형차의 헤드라트 불빛은 표범의 날렵하고 빠른 모습과 흡사하다. 비 오는 날의 자동차는 매끄러운 바다표범의 느낌과 묘하게 닮았다. 분명 생명이 없는 물건이지만
자동차가 마치 힘을 가진 동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아침나절, 길을 건너며 우연히 보게 된 검정 리무진은 왠지 사슴처럼 보였다. 그런데 얼마 전 치러진 장례식에서 근조화환을 앞머리에 붙인 검정 리무진을 보았을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생명이란, 생장하고 변화하며 쇠락하는 일의 반복이다. 자연은 하루에 몇 번이라도 다른 모습을 갖춘다. 어렸을 때, 지는 해가 산 허리에 걸리는 저녁나절이면 앞 산 그림자가 검어지고, 나무는 거인의 커다란 다리처럼 보여서 무서워졌었다.
사금파리를 주워서 풀잎을 짓이긴 반찬을 담던 소꿉놀이는 한 생애를 닮아 있다. 돌로 콩콩 찧어서 나물을 만들고, 흙을 담아 밥을 지었다.
잔가지를 꺾고 다듬어 숟가락과 젓가락을 만들었다.
"화가는 흔히 눈으로 작업을 하며, 보이는 것의 본질과 씨름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 본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술의 속임수와도 같아요. 풍경을 그릴 때 나무, 덤불, 구름처럼 익숙한 요소가 형태를 드러내는 순간을 찾으려 해요. 그것이 살짝 변형되어 우리가 '형태'라고 부르는 것으로 변하는 순간을 찾아요. 보이는 것을 그리면서도 완성작을 통해 전에 못 봤던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죠. 마치 풍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적 아이디어처럼요."라고 니콜라스 파티는 말했다. 작가는 먼지처럼 가볍고 휘발성이 있는 소프트 파스텔로 작업을 한다. 일회성이자 사라진다는 것은 존재를 가볍게 한다.
산의 검은 그림자가 무서우면, 검불이 잔뜩 묻은 엄마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다. 전기가 나간 밤이면 촛불을 켜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림자놀이를 했다. 손가락으로 개 모양도 만들고 고양이도 만들고, 푸드덕 거리는 새의 날개도 만들었다. 묘하게 닮은 어떤 것들을 포착하고 다듬는 일은 외로움을 물러서게 하고 호기심을 불러들인다. 돌은 부처가 되고 나무는 장승이 되어 살아간다. 사물은 변형된다. 생명은 변화하고 쇠락에 순응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한 생애의 기억 담은 몸은 자루처럼 울퉁불퉁하고 한쪽으로 쓰러질 듯 기우뚱하다.
아, 이제야 겨우 평범해졌다.
적당히 소외되고 대체로 고단하게 살아왔던 그 대로, 나는 비로소 제 나이에 맞는 옷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삶이 어떤 형태로 변화하는 알아챔의 순간을 기다리며 어슬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