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롱패딩 점퍼의 모자를 덮어쓰고
걷는다. 장갑을 끼었는데도 손이 시리다. 운동화를 신은 발가락도 시리다. 숨을 쉴 때마다 허연 김이 뿜어져 나온다. 겨울하늘, 차가운 달은 밝다. 한참을 발끝을 보며 걷노라면, 멀리 보이던 카페 불빛이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져 간다. 저녁에 걸을 때는 천변 위 카페 둘레 길을 걷고, 낯에 걷게 되면 길게 이어진 천변 길을 따라 멀리까지 걷는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수양버들의 잎사귀들을 보기도 하고, 천변 가운데에 있는 모래섬에서 고개를 파묻고 볕 쬐고 있는 검푸른 정물 같은 거북을 바라보기도 한다.
작년부터 커피를 끊었지만, 추운 날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더운 날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걷는 길의 친구였다. 편의점에서 맥주와 투명 플라스틱 컵을 사서. 맥주를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마시며 걷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땐 세상도 흔들리고 물소리도 흔들리며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했다. 키에르 케고르의 말대로, 걸으면서 날려 버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생각을 나는 알지 못한다. 걸으면서 둔탁한 생각들은 사그라지고 묵은 감정들의 흘러감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음악도 듣지 않고 어떻게 맨으로 걸어 다니냐고 누군가 물었다. 나는 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 나뭇가지가 부딪치는 소리, 나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 사실, 이런 저녁에는 자동차 소리가 제일 많이 들린다.그래도 좋았다.
두 시간을 서서 나물을 볶았다. 전날 저녁에 마트에 들르니 다양한 나물들과 부럼을 팔고 있었다. 보름날인 것을 기억하고는 나물을 네 팩 샀다. 시래기 나물, 고구마줄기, 취나물, 물가지, 말린 나물을 데쳐서 포장해 놓은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름날이었다. 은근한 불로 나물을 볶았다. 간장냄새, 들기름 냄새가 몸에 배어 들었다.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는 혼자 가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기다려서는 안 되었다는 것을, 걸으면서 느낀다. 삶이 나에게 준 것들이 모두 다 나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 그것들은 단지 나에게 다가왔고, 마디를 남겼고, 지나갔다. 눈을 들어 둘러보니 고만 고만한 사람들이 보인다. 저녁을 걷는 사람들, 혼자이거나 다정스레 손을 잡고 걷는 사람들이 있다. 보름이라고 달이 밝다.
홑 잠바를 입고, 갓쪄낸,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루떡을 돌리러 논둑길을 조부작 조부작 걸어갈라치면, 달빛은 내 뒷목을 감싸며 쉴 새 없이 따라붙었다. 싸갖던 시루떡을 드리고 대신 받아온 무지개떡을 싸들고 돌아오던 길에도 달이 밝았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제대로 학습하지 못했던 나는 부정당하는 것을 웃음으로 무마하며 살았다. 걸으면서 이제야, 나를 진짜로 사랑하는 법을 깨우쳐가는 중이다. 인생의 팔 할은 운이라는데, 좋은 운이 작용하여, 세상의 여러 곳을 걸어보고 싶다. 배수아의 소설 '바우키스의 말'의 한 문장처럼 어휘를 고르듯, 도시를 골라 걸으며 살아 볼 날이 올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