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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함량

by 그방에 사는 여자


이마를 맞대고 스스로를 껴안고 있거나 가슴에 손을 살포시 얹은 모습을 본다.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다독여 주는 듯 보였던 그림을, 가만 들여다보니, 각자 스스로를 보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누군가에게 스며듦은, 고로 오롯한 자신과의 이별을 기꺼이 허락하는 것은 그만큼 그 대상에 동화되고자 하는 열망의 크기 때문일 것'

'나 자신의 내재성에서 벗어나 타인을 마주하고, 이로써 발생하는 모든 내면의 저항을 받아들이겠다는 숭고한 의지는 우리가 함께 하는 삶의 여정이 모호할 수는 있어도 허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서로에 대한 무언의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는 작가의 글은, 전적인 호응과 따뜻한 환대의 경험이 녹아들어있다. 발목 깊이만큼의 덤덤한 관계의 형질을 이어가는 나는 사실 부러울 따름이다. 함께 경험하고 함께 견디고 함께 누리는 적당하고 소박한 관계라는 것은 나에게는 닿을 듯 닿을 수없는 허상이었다.



상갓집에서 만난 낯선 고향 동네 남자는 " 예전에 네 언니가 참 예뻤는데, 아직도 예쁘네"라고 말한다. 순간, 내 안의 어린아이가 당황스레 기어 나와 유년의 윗목에 슬몃 앉아 묻는다. " 아직도 안 끝난 거야? 지겨워, 때린 사람은 없다는데 항상 맞는 기분으로 살아왔어, 이제 지쳤어, 발버둥 치기 싫어" 아이가 몸의 힘을 빼고 눕는다. 나도 옆에 눕는다. " 그만하면 잘해왔어 , 괜찮아 내가 있잖아, 그러라 그래" 아이를 안아준다. 뽀글뽀글 물속에서 숨이 쉬어진다. 우리는 함께 부력으로 떠오른다.



없는 것과, 없다고 느끼는 것, 상실감은 어느 것이 더 클까. 기대치와 허무의 상관관계로 보자면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 상실의 무게가 더 클 것이다. 그러나 존재의 문제라면 또 다르겠지.

외롭다고 느끼는 것과 정말 아무도 없는 것과의 관계가 다르듯.


영화 '게스트 어웨이'에서 운송회사원 임원인 '척' 은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서 4년을 살게 된다. 자신의 피가 묻은 손바닥 모양이 찍힌 농구공에 얼굴의 형태를 그려 넣고, '윌슨'이라고 부른다. 극도의 고립이 만들어낸 타자이자 또 다른 자아이다. 뗏목을 만들어 탈출할 때, '윌슨'은 '척'이 잡을 수도 없이 멀리 흘러가 버렸다.

망망대해에서 '윌슨'을 잃은 ' 척'은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나는 늘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관계 속에서

일정 부분 자신과 불화하며 살아왔다. 냄새라도 맡는지 그들은 구멍을 잘도 알아차렸다. 상처는 약점이 되고, 사르트르의 희곡 ' 출구 없는 방'의 문구처럼 ' 타인은 지옥' 이되었다. 손바닥을 펴고 움켜 쥔것들을 놓았다. 윌슨과 연인의 시계와 마지막 반품 택배 상자처럼 움켜쥐고 있어야 버틸 수 있었던 수많은 타인의 것들을 내보냈다. 무인도에서 살아 나왔으나 약혼자는 이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였다. 다시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듯 느끼던 척은 말한다.

"이젠 무얼 하면 되는지 알겠어, 계속 숨을 쉬면 되는 거야, 내일이면 태양이 떠오를 테니까. 파도에 또 뭐가 실려올지 모르잖아"

켜켜이 쌓은 오늘들로 내일은 다른 내가 다가올지 모르니, 나와 나는 다정하게 살아가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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