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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그릇

by 그방에 사는 여자


그날 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날이 밝자 엄마는 젖먹이 막내 동생을 들쳐업고 새벽길을 나섰다. 무슨 사달이 난 거라며 시체라도 떠 매고 오겠다는 섬찟한 말을 남기고 말이다. 어설프게 잠에서 깬 나는 얼렁뚱땅 불안해졌다.



평생 농투성이로 흙만 파며 살아온 아버지는 그해 겨울, 공사장으로 일을 나가고 계셨다. 나라에서 세우는 커다란 공장이 들어선다고 했다. 육촌 동생인 용이 아저씨와 함께 아침 일찍 나갔던 아버지가 밤새 돌아오지 않자 엄마는, 등짐을 지고 오르내리다가 떨어졌을 것이라고, 그런데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아버지의 도시락은 커다란 밥주발 모양으로 스트로플로 만들어졌고 표면은 연한 노색이었다. 엄마는 아침이면 아버지의 커다란 밥그릇에 밥을 꾹꾹 눌러 담고 뚜껑을 덮어 도시락 속에 넣었다. 반찬이라 봐야 된장국이나 멀건 김치였을 것이다.



새끼줄로 꽁꽁 동여맨 도시락을 들고 새벽같이 일을 나간 남편이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았으니 젊었던 엄마는 그 아침 벼랑 끝을 걸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야간작업을 하느라 집에 돌아오지 못한 것이었다. 집 전화도 없고 동네에 전화가 한 두 집 정도 있던 때이니 연락하기도 어려웠고 무엇보다도 세심한 베려는 사치이던 시절이었다. 아버지의 도시락은 그랬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딱 그만큼이었다. 아버지의 밥그릇은 어찌나 크던지 그 큰 밥그릇 위로 그만큼의 밥이 엎어져있었다. 한 뫼씩 밥을 먹던 아버지는 말년에는 한 주걱의 밥을 간신히 넘겼고 반찬도 조기 한 마리면 족했다.



아마도 장날이었나? 그날은 웬일인지 엄마가 학교에 도시락을 들고 왔다. 누군가 너네 엄마 오셨다며 뒷문에서 나를 불렀다. 복도로 나가니

엄마는 쭈그리고 앉아 보따리 속에서 밥과 반찬이 들어있는 찬합을 꺼내고 있었다. 까만 단발머리는 검정 고무줄로 질끈 묵고. 하얀 블라우스 종아리를 덮는 검정 통치마를 입은 엄마를 보고 짝꿍은 "너네 엄마 예쁘다"라고 했다. 나는 그제야 엄마도 예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논에 나가 피를 뽑고 밭을 매고, 숱 검댕을 묻히고 아궁이에 불을 때 밥을 하고, 산에서 나무를 하고 언 빨래를 하는 것이 엄마인 줄 알았던 철부지가 나였다. 엄마가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철이 들면서부터 밥을 할 줄 알았다. 엄마가 들에서 일하느라 늦도록 돌아오지 못하는 저녁이면 감자 껍질을 벗기고 마당 끝 텃밭에서 마늘 쫑을 뽑아 된장국을 끓였다. 더러는 우물가에서 딴 가지도 밥 위에 얹어 쪄서 무쳤다. 컴컴한 저녁 소먹이 풀을 이고 돌아온 엄마는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 웃었다. 그럴 때면 나는 성질을 냈다. 그것은 곤궁함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반찬 없는 밥상을 차릴 수밖에 없는, 보답 없는 엄마의 고된 노동에 대한, 가난은 그렇게 엉성하고 누추하였다.



전을 부치고 나물을 삶고 볶고 무치고, 고기를 삶아 생전 못다 한 정성을 담는다. 제사 때마다 내어 놓는 사진은 날로 젊어진다. 고봉밥 위에 숟가락을 꽂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덜어 나르며 이것도 드시라 저것도 드시라 혼잣말을 하고 술을 따라 세 바퀴 휘휘 돌린다. 나도 한 잔 마신다. 술 한잔 못 마시는 엄마와도 술태부 아버지와도 살아 생전마주 앉아 마신적 없는 술을 이제야 주거니 받거니 한다. 사는 일은 매번 이렇게 늦는다.



여태, 시골의 논에서 나는 쌀로 밥을 지어먹고살았다. 구멍이 뻥 뚫린 줄 알았지만 매번 채워지는 것이 있어 살아왔구나. 나비가 앉을 묏자리도 없이 납공당 안에 반듯하게 들어앉은 영혼은 어느 하늘을 날고 있으려나. 꽃을 좋아하던 엄마는 어느 꽃자리에, 술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그 옆에 취해서 잠들었으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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