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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Sep 05. 2023

엄마의 팔뚝에는 화상 자국이 있었다.


   

       


엄마는 팔뚝에 어른 손바닥만 한 화상 자국이 있었다. 무더운 한 여름에도 짧은 반팔 티셔츠를 입지 못했고, 팔꿈치를 덮는 칠부 소매의 윗도리를 입었다. 젊은 시절 엄마는 바지를 입지 않았다. 통이 조붓하고 발목을 덮을락 한 길이에 끝단이 살짝 나팔모양으로 퍼진 월남치마를 입었다. 밭일을 할 때도, 모내기나 추수철에 빨간 고무다라를 이고 들밥을 내 갈 때도 그랬다.

"남사스럽게 어찌 바지를 입어!"


 오월 어느 봄날, 엄마는 동네 제일 부잣집  수천네 모내기하는 날 일꾼들 밥을 머리에 이고 내가다가 논둑길에서 넘어져서, 뜨거운 국그릇이 팔뚝 위로 쏟아져 내려서 데었다고 했으나, 덴 것 치고는 깊은 상처였다.


길 한복판에서 넘어지셨을 텐데, 그 순간 나동그라진 음식들을 내 팽개치고 돌아와서 차가운 우물물에 뜨겁게 익은 팔뚝을 식혔을까? 아니면 고통을 꾹 참고 그릇과 음식들을 챙겨서, 모내기가 한창인 논으로 가서 고무 다라를 내려놓고, 그제야 자신의 얽은 팔뚝을 보았을까? 깊은 상처를 보면 아마도 후자였을 것이다.

급한 대로 고무를 붙였다고 했다. 부엌으로 연결된 문을 열고 기어 나오던 아기가 펄펄 끓는 무쇠 솥에 다리를 담그는 바람에 화상을 입었다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리던 시절이니 엄마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견뎠을 것이다.



천이 언니네는 할아버지가 한약방을 하고 종갓집이라서 동네 제일의 부자였다. 할아버지가 계신 사랑에 가면 늘 신기한 냄새가 났다. 천장에는 한약재가 든 하얀 봉지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었고, 벽 한쪽으로는 작은 서랍장 같은 약장이 있었다. 사랑 앞마당에서 구슬치기를 하며 아이들과 놀다 보면 말쑥하게 차려입은 손님들이 찾아오곤 했다. 그들은 모두 마당 끝에 서서 "으르신, 약 지으러 왔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옷깃을 여미고 사랑으로 들었다. 약 지으러 왔다기보다는 꼭 문안 인사 드리러 온 일가 붙이 같았다. 모두가 농사지으며 한데 어울려 지내는 동네에서 그런 인사를 받는 사람은 약국집 할아버지밖에 없는 듯했다.

 마른 몸에 눈이 크고 고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할아버지에게는 오대독자 외아들과 시집간 딸이 하나 있었다. 아들은 서울로 유학을 보내 대학 공부까지 마쳤으나  

할아버지의 엄명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었다. 중매로 결혼한 아줌마는 얼굴이 고운 분이셨으나 몸이 약하여 자주 병원에 입원하셨고 집에 안 계신 날이 많았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일꾼들 밥을 해서 내갈 수가 없으니 일하는 날 아침이면 윤이 언니랑 천이 언니가 학교 가기 전에 우리 집 대문간에 서서 "오늘 집에 일하는 날이라 할머니께서 아줌마가 밥 해주러 오시래요!"라고 말하곤 했다.

엄마는 약국집의 허물어진 한 귀퉁이를 받치는 까래처럼 스며들었다.


착한 엄마는 선의로 도와주러 가셨을 것이나

그 보답으로 약국집의 많은 땅들 중 일부를 무상으로 빌려서 밭농사를 지으셨다. 가난하여 땅이 별로 없었던 우리 집은 그 밭에다 고추도 심고, 콩도 심고 마늘도 심었다. 다들 고만 고만한 살림이라 어렸을 때는 우리 집이 그렇게 가난 한지 잘 몰랐다. 그리고 그 넓은 밭들이 다 우리 것인 줄 알았다.


엄마에게 팔뚝의 화상 자국은 무엇이었을까?

가리고 싶은 상처였을까? 드러 내고 싶은 희생의 징표였을까?


나는 약국집의 언니 동생과 소꿉놀이도 하고 내남없이 드나들며 밥도 먹고 티브도 보곤 했다. 특히 그중에서 내가 좋아했던 것은 공부도 썩 잘하고 웃을 때 눈이 예뻤던 천이 언니였다. 그 언니는 중학교 졸업 후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명문여대에 입학했다. 책을 많이 읽고 감상적인 문학소녀에 가까웠던 언니는 물리를 가르치는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나의 사춘기 시절의 문학적 소양에 한몫을 했던, 글도 잘 썼던 그 언니가 물리 선생님이 되다니, 국어 선생님이면 모를까? 사람은 참 알 수 없구나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가며 엄마는 팔뚝의 화상 자국이 보이는 정도의 반팔 블라우스도 입기 시작했고 남사스러워서 못 입는다던 바지도 입게 되었다.

팔뚝의 상처는 원래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였다. 엄마의 일부인양 누구도 새삼스럽게 말을 꺼내거나 의식하지 않았다.


세 딸들 누구도 화상자국을 지울 수 있는지, 애써 병원을 찾아본다거나 알아본다거나 그런 걸 하지 않았다. 자식에게 그런 상처가 생겼다면 전 세계를 뒤져서라도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병원을 알아내고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엄마는, 원래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원래 그런 게 어딨 던가.


엄마의 장례식은 잔칫날 같았다. 딸만 셋이고 형부도 안 계시고 동생은 결혼을 안 했으니 문상객이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우리 자매는 얼굴도 모르는 친척들까지 많은 문상객이 와서 적잖이 놀랐다. 약국집 딸들도 다섯이 모두 문상을 와서 엄마를 추억했다. 장례식장에 가득한 친척들을 보면서, 사람 좋아하고,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엄마가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웃으며 인사하고  많이 먹으라고 등 두드리고, 잘 지냈냐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작은 엄마는 생전 지은 복을 다 받고 가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밖에서는 웃으며 수그리고, 안에서는 끊임없는 신세 한탄과 자기 연민으로 자식들에게 불안의 씨앗을 틔웠던 엄마.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도 못 해낼 것 같기도 하다.


상처 없는 헌신이 어디 있을까? 오십 중반의 나이가 되어서도 사는 일을 잘 모르겠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길이 없고,

오답 투성이다. 나는 나를 경계해야 한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터부시 하는 것들에, 상처에, 침범에 인색해야 한다. 단순하고 명징하게 손 끝과 발 끝 만을 바라보며, 변주곡을 울리며 걸어가 보련다. 경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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