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는 열매가 아니다.

by 그방에 사는 여자

곶감처럼 꾸덕꾸덕 마르던 볕이 촉촉해졌다. 또, 봄이다.

찬 바람은 한결 누그러졌고 때에 맞게 잎 눈이 삐쭉 솟아날 것이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는 무슨 마음이 들까.

이 씨앗들이 뿌리를 잘 내리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잘 맺기를 바라는 마음일까.


고추농사는 참으로 억울하다.

어린 모종을 사다가 나란히 심어 놓고, 혹여 마를세라 주전자에 물을 가득 담아서 모종에 부어주고

한여름 땡볕에 앉아서 풀을 뽑아 주어야 한다. 어린 나는 쪼그리고 앉아서 밭을 매는 것이 진력이 나서 엄마 몰래 도망가기

일쑤였다. 어쨌든 고춧대는 위로 솟아오르며 자라고 푸른 고추들은 용케도 다닥다닥 잘도 열려서 한여름 고추장에

푹 찍어 먹는 밥반찬 노릇을 톡톡히 했다. 고춧대가 부러질 듯 잔뜩 열린 풋고추를 따다가 끓인 칼칼한 된장찌개 한 뚝배기면

배가 불렀다. 장마가 오기 전에 서둘러 말뚝을 박아 고춧대를 묶어서 잘 고정시켜 놓아야

쓰러지지 않고 장마를 날 수가 있다.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말뚝을 박아 고정시켜 놓은 고춧대는 더러는 말뚝채 뽑혀 쓰러지기도 하고, 붉게 여물어가던 고추들이 떨어져 짓무르고 썩어갔다.

장마가 지나고 길고도 지루한 고추 따기가 시작된다. 고추밭의 고추는

한소쿠리씩 따도 따도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빨갛고 통통한 고추를 멍석 가득 널어놓아도 끝이 아니었다. 소나기라도 맞거나 하면 빨간 고추는 영락없이 썩어 들어갔다. 고추대가 휘어저라 다닥다닥 열리던 고추는 어디 가고, 이래저래 병들고 시들고 썩어

그동안의 수고를 말끔히 없던 일로 만들어 버렸다. 한여름의 땡볕 아래, 마당이란 마당, 행길 가생이에는 온통 붉은 고추로

뒤덮였다. 붉은 고추는 날마다 날마다 햇볕을 먹고 검붉게 변해가고 잠자리는 낮게 날았다.

한여름의 마당은 붉은 멍석 위에서 빛의 잔치를 열었다.

멍석 가득 널고 매일매일 하나씩 뒤집어 주어도 잘 마른 태양초 고추가 되는 고추의 양은 몹시 적다. 길고도 지난한 노동 끝에, 바삭하게 잘 마른 고추를 이고 지고 장날 버스에서 내리면

눈썰미 좋은 장사치들이 앞다투어 낚아채 흥정을 했다.



처음의 열매는 열매가 아니다.

그것은 끝내 잃어야 할 씨앗이었다.

무언가를 키우고 가꾸는 일은, 하나하나 잃어 가며 보답 없는 수고로 채우는 과정이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은, 오직 가을의 수확마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봄의 축제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봄의 계절에 맞게 들판에 씨를 뿌리는 것이다.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은 역동적이다.

봄의 기운이 물씬 풍기고, 꿈틀거리는 희망이 느껴진다.

앞자락의 움켜쥔 주머니 안에는 어떤 씨앗이 들어 있을까.

섬세하지 않고 굵고 거친 붓질은 고단한 삶을 여실히 보여준다.

농부는 다만, 지금 씨를 뿌려야 할 순간에 힘껏 뿌리는 중이다.


장에 나갔던 농부는

간장 종지 만한 그믐달이 뜰 무렵, 막차에서 내려 고등어자반 한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씨간장 한 종지 묻어둔 장독처럼 무던하게 아침을 맞이하여,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길을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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