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영해야 할 것들

산책의 계절이다.

걷기는 늘 하는 것이고, 매일 해야 하지만 초록이 무성한 요즘의 날들은 더할 나위 없이 산책하기 좋은 날들이다.

어쩌다 보니 요즘에는 주로 오후에 집을 나선다. 어느 길로 가야 하나 잠깐 아파트 정자 앞에 멈춰 서니 코끝으로 진한

라일락 향기가 스미었다. 한걸음 한걸음 산들거리는 바람을 타고 꽃 향기와 초록의 내음에 날아든다.

지금, 이 기분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까? 무작정 행복하다고 표현하기에는 떠안은 걱정들과 상념이 있다.

인간은 정말 순도 백 프로의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감정의 보따리는 복주머니만큼 나누어서 담아야 한다.

가슴 한편에 내려앉은 것이 있어도, 라일락 향기는 고교시절의 어느 날 친구들과 수다 떨던 등나무 아래로 데려간다.

등나무 아래에는 라일락 한 무리가 피어 있었지. 수업이 끝나고 야간 자율 학습이 시작되기 전 스쿠루바 하나씩 베어 물고

그 시절이라고 뭐 그리 마냥 좋았을까 만은 그래도 청춘이었다. 인생은 그럴만한 때를 준비해 두지 않는다.

그러니 어느 때라도 아름답다고 느낄 만한 감정의 공간을 남겨 둬야 하는 것이다.



감정에는 각각의 문이 있으며 그 문마다 적절한 문고리를 달아 줘야 한다고, 아이를 키우던 시절 책에서 읽었다.

아이들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와앙! 울음보를 터트렸다. 아이들의 울음에는 여러 갈래의 무늬가

있었다. 당황스럽거나, 화가 나거나, 아쉽거나, 속상하거나, 서운함이나, 억울함, 불편함 같은 감정들이 조그만

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런 감정들을 천천히 읽고 문고리를 달아 주었어도, 문고리는 자주 떨어지고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오락 가락 했다. 인간의 감정은 의식하는 순간 묘하게 뒤섞이며 일그러진다.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다만 알아 차림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뼛 속까지 훤하게 내 보이며 자신의 기분을

설파할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요즘 공부하고 있는 소설 쓰기 수업 첫 강의에서 선생님께서, 주인공의 기분, 머무는 공간, 바라보는 시선에 집중해서 글을

써보라고 했다. 나는 처음으로 쓰는 소설 습작에서 주인공의 기분, 공간, 시선에 집중했다. 지금 이 사람은 어떤 상태인가?

주인공이 외롭기보다는 쓸쓸한 상태라고 정의하고, 조용히 흘러가듯이 도입부를 썼다. A4용지 3장 분량을 채우는 것이

몹시도 버거워서 썼다 지우며 썼다. 선생님께서는 쓸까 말까 망설여지는 문장들은 그냥 쓰라고 했다. 어차피, 나중에 지우면

되니깐. 간신히 과제 분량을 제출하고 다음날 글을 출력하여 읽어 보니, 글이 몹시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합평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주인공의 감정선이 보이지 않는다고 평했다. 감정 상태가 초월한 듯, 어떤 대상과도 한결같다고 말했다.

군데군데 무언가 걸리는 것들을 심어 놓아야 한다고 평했다. 가야 할 길이 멀다. 잘 데리고 가봐야겠다.



기분이란, 변화하는 것이다. 뭔가 걸려 넘어질 듯 기우뚱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내 중심을 잡는 것은 태도의 문제다.

석양을 받고 있는 4월의 나무가 아름다운 것은 제 본연의 푸르름을 장착하고, 빛과 그림자를 한꺼번에 받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내 기분이 어떻더라도 잘 데리고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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