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보다 해석이 우리를 더 지치게 한다
부서에서 듣는 말이 있다.
“리더님은 고집이 세요.”
이상하게도, 같은 입에서 이런 말도 따라온다.
“가장 논리적이에요.”
“기준이 분명해요.”
한 사람을 두고, 정반대의 문장이 붙는다.
그 사이에서 나는 한동안 멈춰 서 있었다.
정말 내가 고집스러운 걸까.
아니면, 누군가는 불편한 기준을 ‘고집’이라 부르고 싶은 걸까.
그리고 더 조용한 질문 하나.
우리가 싸우는 건 사실일까, 해석일까.
나는 “성격”을 탓하는 순간부터 팀이 굳는다고 믿는다.
성격은 변명으로 쓰이기 쉽다.
그보다 더 자주 팀을 멈추게 하는 건, 오래된 사고의 습관이다.
문제를 보면 질문보다 결론이 먼저 나오고,
근거보다 기분이 먼저 앞서고,
‘내 일’보다 ‘받은 일’로 정리되는 흐름.
그 습관은 악의가 아니라 익숙함에서 온다.
그리고 익숙함은, 사람을 편하게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그대로 묶어 둔다.
회의 중에 내가 자주 묻는 말이 있다.
“근거가 뭐야?”
“대안은?”
“결정하려면 무엇이 필요하지?”
그 질문 뒤에 종종 이런 말이 온다.
“그건 너무 빡세요.”
“현실적으로 어렵잖아요.”
“기준이 너무 높아요.”
이 말들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이것들은 대개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다.
어렵다는 건 감정이고,
높다는 건 비교이고,
빡세다는 건 피로의 언어다.
감정은 존중해야 한다.
감정은 신호다. 다만 결정의 근거가 되긴 어렵다.
하지만 감정만 남으면 결정은 멈춘다.
팀은 멈춘 자리에서 서로의 마음만 읽다가,
결국 누구도 움직이지 못한다.
여기서 균형을 한 번 잡고 싶다.
리더가 기준을 세우는 이유는 단순하다.
팀을 지키기 위해서다.
무너지는 품질, 흐려지는 책임, 반복되는 재작업을 막기 위해
“이 정도는 넘어야 한다”는 선을 긋는다.
반대로 팀원이 안정과 평화를 찾는 이유도 단순하다.
사람은 흔들리기 싫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책임, 비난의 가능성, 실패의 비용이 두려워
가능하면 안전한 쪽에 머문다.
둘 다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둘이 같은 언어를 쓰지 않을 때다.
리더가 “기준”이라고 말하면,
팀원은 “압박”으로 듣는다.
리더가 “대안”을 원하면,
팀원은 “정답”을 요구받는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 엇갈림의 끝에서
가장 쉬운 단어가 튀어나온다.
“고집.”
특히 스스로를 프로라 여긴다면 이야기는 더 선명해진다.
프로의 일은 ‘수행’만이 아니다.
프로는 일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만드는’ 사람이다.
애매한 것을 질문으로 바꾸고,
가능한 선택지를 만들고,
결정이 일어날 형태로 문제를 정리하는 것.
그런데 프로라 여기면서도
기획이 비어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팀의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린다.
리더는 점점 더 많이 끌고,
팀은 점점 더 많이 기대고,
서로는 서로를 답답해한다.
여기서 내가 믿는 한 문장이 있다.
완벽을 요구하면 팀은 움츠러들고,
완성을 요구하면 팀은 자란다.
초안이면 된다.
서툴러도 된다.
다만 비어 있으면, 그 빈자리를 누군가가 대신 떠안는다.
나는 고집을 줄이는 방법이
내가 더 부드러워지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계의 공기를 바꾸는 건
대화의 단위를 바꾸는 일이다.
사람을 두고 싸우지 않고,
의도를 두고 다투지 않고,
제안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
의견은 누구나 낼 수 있다.
하지만 제안은 책임을 동반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완벽한 논리가 아니다.
흔들리는 상태로도 꺼내놓는 연습이다.
그래서 나는 팀에 이런 문장을 남기고 싶다.
"의견은 충분해요.
다만 가능하면 '왜 그렇게 느꼈는지'와
'다른 선택지 한 가지'를 같이 적어주세요.
초안이어도 괜찮습니다.
대안은 정답이 아니라,
대화를 시작하는 발판이니까요"
이 두 줄이 들어오면
‘고집’이라는 단어가 덜 필요해진다.
이제 논쟁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문서가 되기 때문이다.
당신의 팀에서 가장 자주 오가는 말은 무엇인가.
사실인가, 해석인가.
그리고 당신이 “고집”이라고 부르는 누군가는
정말 고집 센 사람인가.
아니면 당신이 감당하기 싫었던 기준을
대신 들고 서 있는 사람인가.
오늘 당신은
의견을 냈는가, 제안을 냈는가.
그 차이가
팀의 레벨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