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섭해'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나의 모국어는 한국어, 남편의 모국어는 덴마크어. 우리 둘 모두에게 영어는 제2 언어이다.
한국에서 정규 교육 과정을 마친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웠고, 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복수 전공했으며, 이력서에 영어 수준을 적을 때 Fluent(유창함)이라고 적는다. 남편은 북유럽 선진국 출신답게 영어가 거의 모국어 수준이어서 책 한번 들여다보지 않고도 처음 본 토플 시험에서 120점 만점에 117점을 맞았긴 하지만, 어쨌든 모국어는 덴마크어이다.
이러다 보니 당연히 한국말을 못 하는 남편과, 덴마크어를 못하는 내가 의사소통을 하는 방법은 영어인데 가끔 우리가 같은 언어를 쓰는 부부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그 종종의 대부분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사랑스러운 때가 아닌 서로 주장을 내세우며 언쟁을 할 때, 즉 부부싸움이 벌어질 때이다.
나도, 남편도 싸울 때 '미안해' 혹은 '내가 잘못했어'라고 말하기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제삼자가 옆에서 본다면 이 사람들이 둘이서 싸우는 건지, 아니면 서로 할 말만 큰 소리로 무작정 늘어놓는 대회를 하는 건지 의아해할 것 같다. 왜 내가 잘못한 게 없는지, 그리고 내가 왜 이 상황에서 옳은 건지를 상대방이 듣고 동의하기를 바라면서 우선 쏟아내고 본다. 상대방이야 듣건 말건, 우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고 난 후에야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제 다음을 어떻게 수습하지 하고 생각해 본다. 이미 얼굴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있고, 화가 나서 앞뒤 생각 없이 내뱉어버린 말들 중에는 다시 주어 담고 싶은 말도 있고 다시 한번 더 크게 얼굴에 대고 크게 소리 질러 버리고 싶은 말도 있다. 이게 나와 우리 남편의 부부싸움이고, 아마도 다른 부부들의 싸움일 것이다.
다만 우리 부부의 싸움을 두고 봤을 때, 나에게는 한 단계 과정이 더 거쳐져야 해서 더 화가 나고 더 눈물이 나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한국말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영어로 다시 이야기해야 하는 그 과정이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고 조목조목 따지고 싶은데, 영어로 그 생각을 내뱉고 싸우다 보면 내 머릿속에서는 엄청나게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던 말들이, 내가 들어도 말이 안 되게 느껴질 때도 있고, 핵심이 뭔지 통 알아들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한국말이라면 한 문장이면 끝날 것이 영어라서, 외국어라서, 제2언어라서 고구마를 먹다가 체해버린 것처럼 , 가슴 한가운데 퍽퍽하게 남아서 숨쉬기가 힘들게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너에게 정말 섭섭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섭섭하다'라는 나의 감정을 한마디로 전달하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I am sad'도 아니고 'I feel disappointed'도 아니다. '나는 이렇게 너에게 마음을 쏟고 있는데, 너는 그런 내 맘을 이해해주지 않으니 내 마음 한편이 아리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다. 이런 내 처지가 슬프고 처량해서 싸우던 것도 멈추고 그냥 엉엉 울어버린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한국말을 잘하는 남자랑 결혼했으면 이런 서럽고 답답한 싸움은 없었으려나?
한국말을 잘하는 남자와 살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한국어를 잘하는, 혹은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과 산다고 해도 여전히 부부싸움은 있을 것이고 서로의 이야기보다는 내 이야기를 먼저 외쳐대고,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하다는 생각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내 친구들도 한국인 남편과 부부싸움을 하고, 남편이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고 이야기한다. 아마 우리 부부보다는 싸움이 짧게 끝날수는 있겠지만, 확실히 같은 언어로 부부싸움을 한다고 해서 덜 싸우거나, 혹은 더 고급지고 영양가 있는 싸움을 하는 건 아닌가 보다.
내 언어가 아닌 말로 싸우는 건 정말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이다.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하게 하지 못해서 화가 나고,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을 해야 할지 머리를 엄청 굴려야 하는 과정이다. 이런 힘든 과정에도 불구하고 부부싸움은 피해지지가 않는다. 아니, 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사람과 평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내 입장을, 내 마음을 설명하고 설득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싸움에서 제대로 전달이 안되면 다음 싸움에는 조금 더 효과적으로 전달이 될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멋지게 남편에게 한방을 날리기 위해 화난 마음을 머릿속으로 논리적으로 정리하다 보면 벗겨졌던 뚜껑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한다. 희한하게 이성을 되찾으면 영어 실력도 함께 다시 돌아오는 것만 같다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더 이상 서로 싸우지 않으면 그건 우리의 사랑이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싸울 가치도 없는 그런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라고. 그러니 사랑하며 평생 계속 싸우자고. 물론 계속 사랑하며 싸우지 않는 그런 부부가 되고 싶지만, 그러면 너무 재미가 없어질 것 같으니 젊은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싸우고 화해하며 살아가야겠다. 그리고 남편에게 '섭섭해'가 어떤 감정을 뜻하는지 알려줘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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