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0
기다림이 있는 하루하루는 지쳐갔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었다. 나의 가을방학은 오후반차로 시작했다. 오전에 회의를 두 개를 하고 급하게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것들을 정리해서 메일을 보냈다. 메일의 자동회신도 설정을 해두었다. 오늘 오후부터 복귀하기 전날까지 나에게 메일을 보내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휴가를 알 수 있게 또 언제 복귀하는지도 분명히 적어 넣었다. 팀에 나의 휴가를 알리고 나는 컴퓨터를 껐다. 진짜 나 당분간 쉬는 거야? 너무 들뜬 나머지 배도 고프지 않은 것 같았다. 미리 계획해 둔 방학의 시작은 동네 새로 생긴 돈가스집에서 남이 해준 밥을 먹는 것이었다. 요리를 하면서 힐링을 하는 나지만 방학의 시작은 남이 해준 밥이면 좋을 것 같았다. 메뉴도 미리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점심을 먹고는 단골 카페에 가서 책을 읽어야지. 별거 없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살고자 했다.
대충 책상을 정리하고 서재문을 굳게 닫고 나서 씻고 짐을 챙겨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이미 점심시간을 한참 지난 시간이라 식당 안은 한적했다. 연세가 있으신 두 분이 각자의 테이블에서 혼밥을 하시고 계셨고 나도 혼밥에 합류했다. 제육과 돈가스가 있는 제육돈가스 정식을 시키고는 핸드폰을 열어 친구와 카톡을 하며 밥이 나오길 기다렸다. 설레어 고프지 않던 배는 음식 냄새와 함께 너무 고픈 배로 바뀌었다. 매일 지나치며 눈여겨 봤던 식당의 돈가스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내가 딱 좋아하는 맛이었다.
느리게 먹는 편인 나는 천천히 밥을 먹고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주말마다 가는 나의 동네 단골 카페의 유리문 손잡이를 잡자마자 걸려오는 회사 전화.
'그래, 오후 반차니까 헷갈릴 수 있고 아직 시간이 많이 안 지났으니까..'
회사 동료는 내일부터 휴가인 줄 알았고 오후 반차인 줄은 몰랐다고 했다. 복귀와 동시에 작업할 일거리를 그렇게 받았다. 성격이 급한 나는 당장 해치우지 않으면 곱씹어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서 이렇게 쌓아 놓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앞으로 20일 뒤에 할 일을 아마도 며칠은 곱씹을 것이고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또 생각할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한참 통화를 한 후에 카페에 들어서서 늘 먹는 아이스오트라떼를 디카페인으로 주문하고 앉아서 책을 폈다. 책을 읽다가도 문득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가을방학을 기다리며 나는 버텼고 설레었다. 그리고 20일 동안 무엇을 할지 많이 생각했다. 나의 결론은 운동, 요리, 독서, 산책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나를 세심하게 돌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기다려온 나의 소중한 시간은 시작부터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