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
오늘도 느지막이 일어났다. 느지막이 일어났어도 어떠랴, 나는 방학 중인데. 마음껏 늘어지고 싶었다. 양치와 세수만 겨우 하고는 전에는 아침 조깅으로 다니던 코스를 걸었다. 한동안 걷지도 뛰지도 않아 최근 무릎이 다시 말썽을 부리고 있던 터라 천천히 다시 걷기로 했다. 어른들은 직장으로 아이들은 학교로 모두 간 시간이라 산책 코스를 걷는 중간에도 사람이 적었다. 늘 다니던 산책길에는 연세가 있으신 분들과 어쩌면 나처럼 방학중일지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했다. 그래도 텅 비어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은 완전히 깨졌다. 그동안 내가 회사일을 하고 있을 때도 나의 산책로는 다양한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4km가 조금 넘는 거리를 걸었다. 오는 도중 이제는 철이 지나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무화과를 무려 1kg에 5천 원에 팔고 있는 가게를 발견하였다. 현금도 카드도 없던 나는 계좌이체로 무화과를 한 박스 구매해서 집으로 왔다. 아주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동안 가능하면 끼니를 만들어 먹자는 생각으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워 밥을 차려냈었다. 오늘은 좀 다른 날이었다. 마음을 가득 담은 제대로 한 끼를 차리고 싶었다. 냉장고와 저장고를 뒤져서 꺼낸 재료는 양파, 버섯, 그리고 고형카레였다. 친구들에게 인정받은 몇 안 되는 나의 요리 중 하나가 카레이다. 인스턴트의 고형카레로 끓여내는 카레지만 나만의 레시피가 있었고 나의 카레는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오늘은 깔끔하게 채소만 넣고 카레를 끓이기로 했다. 오랫동안 양파를 볶아내고 새송이버섯을 잘라 넣어 눅진한 카레를 끓여냈다. 작은 올케의 어머니인 사돈어르신이 동생네에 보내주신 총각김치와 고구마줄기 볶음을 올케가 나에게도 나눠줬기 때문에 평소라면 냉장고에 없는 김치가 나에겐 있었다. 보기완 다르게 김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는 평소에 늘 김치 없이 끼니를 먹는다. 김치가 먹고 싶은 경우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그럴 땐 이렇게 동생네에서 한두 끼 정도 먹을 김치를 얻어다 먹는다. 카레를 만들고 달걀을 부치고 들기름에 두부를 구웠다. 늘 그렇듯이 흰 쌀에 여러 잡곡을 넣어 (오늘은 차조와 렌틸콩을 넣었다.) 냄비에 밥을 지어낸다.
전기밥솥을 없앤 지 7년째인 것 같다. 7년 전쯤 전기밥솥을 보며 혼자 밥을 해 먹기엔 너무 크고 밥솥에 오래 밥을 두고 싶지 않았고 전기밥솥의 뚜껑을 설거지하는 것은 너무나 귀찮고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가정 내에서 전기를 가장 많이 잡아먹는 전기 제품 중 하나가 전기밥솥이라고 들었다. 그래! 없애자! 그렇게 나는 솥밥 7년 차의 1인가구 살림인이 되었다. 처음엔 제일 작은 휘슬러의 압력솥을 샀다. 막연히 무서웠던 압력솥으로 하는 밥은 늘 성공적이었다. 게다가 모든 부품을 분해해서 설거지할 수 있다는 점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단점이 생겼다. 1인가구로 밥을 하기엔 적은 양을 하기는 조금 힘들었다. 그래서 냄비에 밥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두 번째로 구입한 것은 무쇠냄비로 유명한 스타우브의 라이스 꼬꼬떼 12cm 블랙이었다. 정말 작았고 무쇠솥이면 가마솥 밥맛이 날 것 같았다. 만족스러웠다. 단점은 무겁다는 거 설거지를 하다가도 실수로 발등에라도 떨어뜨리면 금 가는 정도가 아니라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단단함과 무게였다. 그리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녹이 났다. 그 녹을 없애고 다시 시즈닝을 하기를 수차례 결국 나의 무쇠솥은 싱크대 깊숙한 곳으로 옮겨갔고 가끔 국과 찌개를 끓이던 작은 뚝배기로 밥을 하기 시작했다. 뚝배기로 밥을 하면서 설거지의 귀찮음을 또 한 번 느꼈다. 박박 문질러 닦기엔 도자기는 조금 약했다. 결국 나는 핀일로 고메 라이스팟 로우로 정착했다. 스테인리스라 바닥이 조금 타거나 재료가 눌어붙기라도 하면, 나의 최애 세제인 과탄산소다를 한 스푼 넣어 불리면 되니 설거지도 좋았고 스팀홀이 없어 뜸 들일 때 밀폐가 된다는 것이 좋았다. 밥도 2-3 공기 정도로 딱 맞았다.
오늘의 웬일인지 카레는 평소의 내 카레답지 않게 맛이 없었다. 그런데 맛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천근만근의 몸을 일으켜 세워 그래도 내손으로 한 끼는 해 먹자는 마음으로 억지로 차려낸 밥이 아니라 나를 위해 만들어준 오랜만의 따뜻한 한 끼였기에 내 마음이 맛있다고 마음으로 생각했다. 나 저녁엔 뭐 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