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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차 Jul 21. 2024

습도와 예민함의 상관관계

벽지도 울고 나도 울고

2020년 2월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전염병의 시대를 맞이하여 회사는 재택근무를 시작하였다. 처음 2주를 시작으로 금방 잡힐 것만 같았던 그 전염병은 전 세계를 넘어 우리나라에도 퍼지기 시작했고 재택근무의 기간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늘어나기 시작했다. 

업무 특성상 회의는 잦지만 온라인 회의로 대체하면 그만이고 다른 나라의 지사와 온라인 회의를 자주 했던 터라 온라인으로 하는 회의가 어느 정도 익숙했기에 금방 적응을 했다. 문제는 내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계약면적 19평의 방 2개짜리 작은 복도식 아파트였다. 침실에는 침대와 서랍장만 있었고 예전부터 나는 잠자는 시간이 아니면 잘 눕지를 않고 침실에 들어가지 않는다. 아주 작은 방은 옷과 기타 짐들이 가득했고 우리 집에는 일을 할 수 있는 테이블은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커다란 식탁이 전부였다. 좁은 주방 좁은 거실을 꽉 채울 만큼 커다란 식탁.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 간단히 무언가를 식탁에서 먹고 식탁에서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보던지 책을 읽던지 글을 쓰고는 잠을 자러 침실로 들어가는 게 보통이다. 거실과 식탁은 나에게 있어서 퇴근 후와 휴일 일과 상관없는 오롯한 나의 시간에 온전히 휴식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재택을 시작하면서 나의 휴식 공간은 사라졌다. 밥을 먹는 먹는 곳, 책을 읽는 곳, 영화를 보는 곳, 심지어 멍하니 있는 곳까지 모두 일터와 일치해 버렸다. 마흔에는 나도 큰 빚을 내서 즉 용기를 내서 자가를 갖겠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 코로나는 나에게 큰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등을 떠밀었고 그 해 6월 나는 여러 집을 놓치고 패닉에 빠진 상태에 있다가 집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인테리어 비용만큼 비싸게 산 집이라 반셀프로 인테리어를 해야 했고 밤새 공부하고 계획하고 여기저기 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나의 집을 갖기 전에 나는 하숙집, 기숙사, 고시원, 잠만 자는 방, 월세, 전세로 옮겨 다녔고 남에게 세를 주는 집들은 가장 저렴한 합지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자가를 갖기 전 전세 집은 내가 도배를 하고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도 물론 가장 저렴한 합지로 도배를 하고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나의 집이었고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었고 오래 살고 살아야 했기에 비싼 실크벽지를 골라 도배를 했다. 9월 말에 인테리어가 시작되었고 10월에 나의 집에 들어갔다. 내가 몰랐던 실크벽지 도배는 초벌 도배를 한 후 모서리에만 풀칠을 하여 도배를 하기 때문에 도배가 벽에 딱 붙어 있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가을에 한 도배는 건조한 겨울에 터졌다. 건조해서 벽의 위와 아래에만 칠한 풀이 세게 잡아당겨(?) 터진 거라고 했다. 보수를 요청했고 보수를 했다.  


(왼) 처음 발견한 벽지 터짐 (가운데) 벽지는 하루가 다르게 양옆으로 이음새로 터저나갔다 (오) 어차피 새로할 벽지 조카의 그림판이 되었다.

새로 보수한 벽지는 다음날 이른 아침에 또 터졌고 또 보수를 했다. 도배를 맡긴 업체는 일정이 맞지 않아 나는 점점 더 길게 터져가는 너덜너덜한 벽지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두 번째 도배를 했다. 이른 봄이었다. 똑같은 벽지로 보수를 해줘야 하는데 업체는 사용하다 남은 그냥 하얀 벽지로 보수를 해줬다. 처음 보수한 벽지는 굉장히 똑같았는데 두 번째 보수를 해 준 벽지는 그렇게나 내가 싫어하는 펄이 가득한 하얀 벽지였다. 더 이상 무언가를 요청하기엔 나는 너무나 지쳤다. 살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하는 마음을 갖기로 했다. 그 해 겨울은 너덜한 벽지와 함께 했고 조금만 건조해도 또 벽지가 터지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매일을 벽 여기저기 살펴보며 겨울과 봄을 보냈다. 

(왼) 처음 보수를 했던 날 (가운데) 첫 보수를 한 다음날 또 다시 터진 벽지 (오) 터진 벽지는 또다시 이음새로 약한 부분으로 터져나갔고 벽지가 터지다 못해 날개처럼 파닥거렸다

그리고 여름이 되었다. 건조의 계절이 지났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초여름이 지나고 비가 오기 시작했다. 장마의 시작. 비가 한창 오던 어느 날 매일 벽을 살펴보며 조마조마하던 맘을 잊고 지낸 어느 날 무심코 벽을 봤다. 두 번이나 터져 겨우내 마음을 졸이게 했던 거실 한 면의 벽지가 우글거리기 시작했다. 또 터질 조짐인 건가? 보일러도 틀지 않았고 건조하지도 않고 오히려 너무 습한데? 부랴부랴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실크벽지는 중간이 벽에 붙지 않고 떠 있는 상태라 습도에 따라서 조금씩 변한다고 한다. 건조한 날은 팽팽해져 운이 나쁘면 터질 수도 있고 비가 오는 날이면 우글우글 해지기도 한다고 한다. 마음이 조금 놓였으나 이 우글거리는 상태로 멈춰버릴까 또다시 벽을 매일 살피는 나날이 되었다. 

겨울부터 벽지라면 예민했던 내가 또 다시 장마 기간 내내 벽지를 살펴보느라 예민했던 걸까? 아니면 날씨에 따라 기분이 널뛰기 때문에 예민했던 걸까? 먹구름이 끼면서 내 머릿속에도 먹구름이 스멀스멀 차오르기 시작했다. 작은 일에도 예민했고 활기차려고 노력했던 모습조차 사라졌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않고 영상과 SNS를 둘러보는 시간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손수 음식을 해서 나의 끼니를 챙기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고 힐링을 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배달음식과 빵 그리고 온갖 냉동식품과 인스턴트식품으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가끔은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쉬지 않고 입으로 뱃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는 것 같았다. 회사 일에도 예민해졌고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예민해졌다. 그렇게 장마가 시작되면서 벽지도 울고 내 마음도 울었다. 

긴 장마가 지나고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벽지는 매일 조마조마하며 벽을 살펴보던 내 조바심과는 다르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팽팽하게 펴졌다. 이유 모를 예민함으로 날카롭게 서 있던 나도 끝이 뭉툭해지며 마음이 쨍쨍해졌다. 그렇게 처음 거실 벽 도배지와 사계절을 보내며 나도 한 번 더 성장한 것 같다. 지인 중 누군가가 갑자기 벽지가 좀 이상해졌다고 했을 때, 건조해서 그렇다 아니면 장마라 습해서 그렇다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조금 더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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