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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차 Sep 14. 2022

깊은 여름의 맛, 무화과

여름을 기다리게 하는 무화과

옅은 갈색을 띠면서 작게 쪼그라져 있는 단맛을 극강으로 뿜어내는 말린 무화과가 아닌 씹으면 과즙이 나오는 무화과를 처음 접한 것은 10년 전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였다. 한 번 눈이 많이 온다 싶으면 1m 가까이 내려 집 대문이 열리지 않아, 동이 트지 않은 어두운 새벽잠을 쫓으며 할아버지는 집 마당과 골목길을 싸리비로 눈을 연신 쓰러 내던 겨울 아침은 할아버지의 비질 소리에 깨던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나는 무화과는 볼 수 없는 나무였다. "그대여 이렇게 무화과가 익어가는 날에도 너랑 나랑 둘이서 무화과 그늘에 숨어 앉아~"를 그렇게 따라 부르던 어릴 적에도 무화과는 마치 팝송을 우리말로 소리 내어 받아 적어 부르는 것 같은 내 귀에 들리는 잘못된 단어라고 생각했다. 이런 내가 대학생이 되어 학교 근처 호프집에서 말린 무화과 안주를 처음 먹었을 때도 충격이었는데, 이 무화과를 생으로 먹을 수 있다니! 바르셀로나에는 이걸 먹으러 왔나 보다 했다.

2000년대 초반 유럽 배낭여행이 유행하던 시절에 나는 여권도 없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무계획 유럽 여행에 대한 작은 로망이 있었고 그렇게 유럽으로 갔던 30대 초반의 나는 더 이상 20대 초반의 에너지가 없었고, 호기롭게 들어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2주를 그것도 급하게 며칠만 예약한 한인 민박집에서 쭉 머물게 될지는 몰랐다.

남들은 이틀이면 다 본다는 바르셀로나에서만 2주를 마치 그곳에 사는 사람처럼 빨래방에서 빨래를 돌리고는 근처 카페에서 커피 마시면서 책을 읽으며 이게 여행이 맞나? 싶게 보냈다. 한 숙소에서 오래 있을 때의 장점은 마치 내 집처럼 느껴진다는 것과 나는 그대로인데 사람들이 바뀌니 다양한 정보를 나에게 공유해주었다. 그렇게 알게 된 무화과. 꼭 먹어보라던 룸메이트. 그 룸메이트와 근교 여행도 함께 했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강남역에서 만나 여행의 회포를 풀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는 나를 무화과의 길로 안내했다. 

사진으로도 보지 못했던 무화과를 바르셀로나 시장에서 겨우 찾아서 사서 설레는 마음으로 한입 먹었을 때의 내 표정을 기록에 남기지 못한 게 아쉽다. 이건 도대체 무슨 맛이지? 달지도 않고 왜 말린 무화과처럼 극강의 단맛을 뿜지 않을까? 그냥 맹맛이었다. 

나의 장점 중 하나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러 번 같은 것을 도전해 본다는 것이다. 유명 작가의 책을 한 권 읽고 내 스타일이 아니면, 이 책만 그렇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모든 책을 사서 다 읽고 나서야 그 작가는 내 스타일이 아닌 것을 깨닫는 어쩌면 조금 무식하고도 답답하지만 그래서 또 진정 좋아하는 것을 찾기도 한다. 

맹맛의 무화과를 나는 여러 번 도전했다. 추운 겨울이 오고 있어서 그런지 무화과는 짧게 나오고 끝났다. 더 이상 도전을 못하게 될 때까지 매일 무화과를 먹었다. 여전한 맹맛. 

그러나 나를 무화과의 길로 안내한 룸메이트의 한마디 "언니, 여름이 아니라 좀 그래요. 여름에 먹으면 진짜 달아요." 그 말이 왜 잊히지 않았을까? 

짧은 여행이 끝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나는 다 잊고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여름 어느 날 강원도를 다녀오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무화과를 파는 농가 팝업이 있었다. 어! 여름에 먹으면 맛있다는 그 무화과! 주저 없이 한 상자 사서는 설레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먹었다.

아! 달다! 말린 무화과처럼 극강의 단 맛은 아닌데 이 오묘한 단 맛은 뭐지? 너무 달고 수분이 가득한 것이 너무나 내 취향의 과일이었다. 

역시 지구 온난화는 우리나라에서도 무화과를 자라게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 당시 막내의 여자 친구였던 현재의 올케가 "언니 이거 어릴 때 많이 따 먹었어요."라는 말에 얼마나 놀랐던지.

김지애의 몰래한 사랑에서의 "무화과 그늘 아래서~"는 진짜였다. 

그렇게 나는 매년 더워지면 무화과를 기다리고 추워지면 다음 여름을 기다리는 무화과 인간이 되어 있었다. 

무화과는 철이 길지 않아 과일가게에서 보이면 무조건 사서 챙겨야 하는데 1인 가구에게는 하루에 몇 개씩 먹어대도 한 상자는 물러지기 전에 다 먹기가 쉽지 않다. 

올해 첫 무화과는 마켓 컬리에서 주문한 무화과였다. 물가도 올라, 한 상자에 몇 개 들어 있지도 않은 것을 아껴 먹었다. 집 앞 과일 가게에서 조금은 무른 무화과를 싼 가격에 한 상자 사서는 무화과 잼을 한 병 만들었다. 살짝 쓴맛이 날까 싶어 껍질을 다 까고는 마스코바도를 넣고 레몬즙을 넣어 조금은 덜 단 무화과잼을 만들었다. 레시피는 없다. 그냥 내 맘대로 적당히. 다음번에 또 만들 땐 같은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맛을 정확히 기억을 못 할 테니 괜찮다. 또 새로운 맛을 보게 될 테니.


껍질을 손질한 무화과에 마스코바도와 유기농 설탕을 섞은 후 레몬즙을 조금 넣어 쨈을 만들었다.

 

무화과의 계절은 짧다. 여름이 무르익어 아주 깊은 여름이 되었을 때, 곧 가을이 올 것 같은 공기가 느껴지려고 할 때 그때를 놓치면 안 된다. 집 앞 과일 가게에서 무화과를 발견하지 못한 날은 어김없이 마켓 컬리에서 무화과를 주문해서 부지런히 도 먹었다. 이때를 놓치면 또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하니까. 


무화과 잼은 빵에 꾸덕한 그릭요거트 또는 크림치즈와 함께 발라 먹기도 하고, 생 무화과는 요거트 너무 잘 어울려 물러지기 전에 부지런히 챙겨 먹었다.


지난 6월 초에 친구와 제주도 여행을 갔다. 둘 다 뚜벅이 었던 우리는 제주의 작은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 동네 산책을 하며 보냈는데, 그곳에서 무화과나무를 많이도 봤다. 친구가 아니었으면 무화과나무인 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뻔했다. 주인이 없는 그냥 자라는 나무 같았다. 돌보지 않는 길에 하나 저 멀리 구석진 곳에 하나 흩어져 있었다. 아직은 한참을 익혀야 먹을 수 있는 작고 초록색의 무화과가 잔뜩 달린 나무. 잎은 싱싱했고 왠지 그 나무에서 따 먹는 무화과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맛일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더워질 다음 여름을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다음 여름에는 무화과가 익을 때에 제주도 그 작은 마을을 방문해야 할 것 같다. 동네 어르신들께 여쭤보고 주인이 없는 무화과나무면, 한 두 알쯤 따 먹어도 되겠지? 주인이 있다면 그 주인을 찾아가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원 없이 먹을 만큼의 무화과를 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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