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차 Jan 05. 2024

보라색 커튼의 식당

#4

 짙은 보라색 커튼과는 대조적으로 가게 안은 연한 라임색이 감도는 벽지가 발라져 있고, 불 빛이 환하다. 여전히 인기척이 없다.

”여기요! 아무도 없나요?” ”…” 인기척이 없다. 

궁금해진 나는 가게 안쪽의 카운터로 가까이 갔다. 카운터의 뒤쪽으로 깊숙한 곳에 주방이 있는 것 같다. 짙은 고동생의 커다란 나무문이 살짝 열려 밝은 불 빛에 맛있는 냄새가 얹혀 흘러나온다. 조금 더 가까이 가본다.

 

 톡. 톡. 누군가가 내 어깨를 쳤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파란 눈동자, 금발머리의 키가 큰 아가씨가 서 있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이국적인 생김새와는 다르게 한국어를 굉장히 유창하게 했다.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아니면 아주 어린시절부터 한국에서 살았을 것 같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워서 이렇게 완벽하게 한국어 발음을 할 수 있는지 조금은 의아했다. 활짝 웃는 그녀의 파란 눈동자는 마치 보석 같았다. 

”아,, 죄송해요.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안쪽에 누군가 계실 것 같아서 좀 살펴봤어요. 좀 이른 시간이긴 한데, 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조금은 멋쩍은 듯이 뒤로 물러나 접시, 와인잔 그리고 포크와 나이프가 깔끔하게 놓인 구석자리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메뉴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녀가 활짝 웃으면서 작은 메뉴판을 보여줬다.


오늘의 메뉴

계절 샐러드 (감귤소스)

식전 빵 (올리브오일)

버섯크림소스의 닭가슴살 리소토

하우스 와인

셈라

커피 또는 홍차

25,000원


메뉴는 딱 하나다. 가게 앞 입간판에 쓰인 것 외에 다른 것을 살짝 기대했는데, 그게 전부다. ’ 셈라?’ 이름이 생소하다. 한 손에는 포장된 죽이 들려져 있지만, 저녁을 주문한다. 포장된 죽은 내일 아침에 먹는 걸로 해야지. 주문을 받고 메뉴판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이 경쾌하다. 잠시 뒤 그녀는 채소가 소복하게 쌓인 접시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접시에 방금 구웠는지 따뜻한 포카치아 빵을 담아 들고 왔다. 그리곤 재빠르게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 레몬이 한 조각 띄워진 작은 유리병을 들고 와 조금은 미지근한 물을 따라주었다. 레몬향이 살짝 도는 물로 목을 축이고는 따뜻한 빵을 찢어 작은 종지에 담긴 올리브 오일을 담뿍 찍어 입에 넣는다. 입안에 퍼지는 올리브 오일의 향이 고소하다. 내가 좋아하는 당근이 곱게 채 썰려 올라간 계절 샐러드도 감귤의 향이 진하게 나는 달콤한 감귤소스와 어울린다. 맛있다. 감기 기운에 몸이 으슬거리는데도 차가운 샐러드를 포크로 크게 찍어 먹으니 살 것 같다. 입맛이 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빵에 샐러드를 듬뿍 올려 먹어본다. 치즈가 조금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치즈요.” 치즈가 담긴 작은 접시를 내려놓으며 그녀가 말했다. 에담 치즈다.

”그리고, 여기 와인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치즈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내 물음에 그녀는 아무런 말없이 환하게 웃는다.

조금은 신기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원래 치즈를 주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치즈를 조금 잘라 빵 위에 얹고 샐러드를 올려 한입 베어 문다. 역시, 치즈가 더해지니 맛도 풍미도 더 좋다. 맛있다.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킨다. 의사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던가? 잠깐 생각하다가 이내 잊어버렸다. 입안 가득히 퍼지는 와인향과 온몸에 퍼지는 알콜의 기운이 으슬거리는 기운을 없애주는 것 같다. 이것들 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식사라고 생각할 때, 그녀가 가운데가 움푹 파인 커다란 접시를 들고 온다. 오늘의 메인 식사가 나왔다. 우리나라의 죽과 비슷한 모양새다. 이렇게 예쁜 그릇에 담겨나오는 이국적인 음식들은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 후로는 먹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우선 커다란 닭가슴살을 집어 먹었다. 퍽퍽하지 않고 부드럽다. 와인도 한 모금 더 마셨다. 따뜻한 리소토와 와인 덕에 감기는 애초에 걸리지도 않았던 것처럼 느껴진다. 밥을 먹는 동안 아무도 가게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역시 골목 안쪽 주택가에는 이런 레스토랑은 조금은 어울리지 않지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찡긋 웃어보인다. 설마 내 생각을 알아챈건 아니겠지? 치즈도 그렇고 뭔가 파란 그녀의 눈동자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꿰뚫어 보는 마법구슬인 것만 같았다. 주방 안이 조용하다. 그녀가 음식도 만드는 걸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그녀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그녀가 읽던 책을 내려놓고 그릇들을 치워준다. 정말 깨끗하게 접시들을 비워냈다. 오늘 하루종일 먹은 게 없어서 그런지 배가 많이 고팠나 보다. 달그락거리는 소리하나 내지 않고 그녀는 재빠르게 그릇을 치워주었고, 차는 커피와 홍차 중에 어떤 것으로 할지 물었다. 감기 몸살 약에 카페인은 좋지 않겠다 생각이 들었지만, 커피를 골랐다. 따뜻한 공기에 몸이 노곤해져 온다. 잠이 오려던 찰나, 주방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신이 든다. 조금은 기다란 쟁반 위에 조금 큰 베이비슈처럼 생긴 빵이 담긴 오목한 접시와 향이 좋은 커피 잔이 놓여있다. 그리고 따뜻한 우유도 한 잔 함께 나왔다.

”셈라와 우유 그리고 커피입니다.”

”어떻게 먹으면 되는 거죠? 처음 본 디저트예요.”

”우선 커피랑 드셔도 되고, 셈라에 우유를 부어 드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처음 보는 모양새의 빵이다. 커다랗고 동그란 빵의 안쪽에 크림이 가득 들어 있다.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빵이 살짝 딱딱하고 차갑다. 크림은 적당히 얼어 식감이 좋다. 적당히 달다. 조금 차가운 빵인 게 흠이다. ’ 이래서 우유를 부어서 먹으라는 거군.’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내가 좋아하는 고소한 맛이다.

”커피 너무 맛있어요.”

”스웨덴에서 가져온 원두예요. 향이 좋죠?”

”스웨덴이요? 신기하네요.”

그녀가 또 방긋 웃는다. 

따뜻한 우유를 셈라가 담긴 접시에 담뿍 붓는다. 어떻게 먹는 거지? 살짝 고민하고 보니, 은색 숟가락이 반짝거린다. 숟가락을 들어 크게 한 덩어리 떠 내어 입에 넣는다. 우유와 빵 그리고 크림이 섞여 고소하고 부드럽다. 한 숟갈 더 듬뿍 떠서 입에 넣는다. 하얀 크림과는 다르게, 생강향이 나는 크림이 안 쪽에 들어 있다. 독특하다.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커피의 향과 셈라의 부드러움이 너무 잘 어울린다. 셈라의 생강향과 따뜻함 때문인지 감기 기운이 사라지는 것 같다.

이전 03화 약국과 죽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