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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차 Jan 05. 2024

약국과 죽

#3

겨울이라 저녁 7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은 캄캄하다. 서울 시내는 여기저기 환하다. 모두들 즐거워 보인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골목길. 집 앞 골목길 1층 상가에 천이 드리워져 있다. 큰 보라색 천 위로 coming soon이라는 글자만 크게 쓰여 있다. ’ 뭐지?’ 낮에 공사를 하는가 보다. 인기척이 없다. 살짝 궁금해진다. 저녁은 냉동실에 얼려 놓은 밥과 국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진해에서 엄마가 보내 주신 반찬을 꺼내 간단히 먹는다. 너무 조용한 것이 싫어서 보지도 않는 유튜브를 틀어 놓는다. 이제는 더 이상 예능프로도 웃기지가 않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집 청소를 하고 요즘 취미로 하고 있는 건담을 만지작거린다. 날씨가 좋은 가을이었다면 동네 한 바퀴라도 돌아볼 텐데 아직은 추운 겨울이다. 지금 만들고 있는 이 모델은 한 번에 다 완성하면 될 것을 한 달째 잡고 있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저녁시간이 너무 무료하기 때문에 아주 조금씩 하고 있다. 벌써 11시가 넘었다. 자야지.


목요일 퇴근 시간. 

내일은 회사 창립기념일이라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다. 월요일 오전에 시작된 으슬으슬한 기운이 사라지지 않는다. 낫지도 더 심해지지도 않는다. 목도리를 단단히 둘러매고 사무실을 나온다.

”휴일 잘 보내세요!”

다들 짧은 여행들을 다녀온다고 한다. 나는 감기기운 탓으로 집에서 쉬는 걸로 결정했다. 집 앞 골목길, 며칠 째 coming soon이라 쓰인 천막이 그대로다. 낮에 공사를 하긴 하는 걸까? 공사 중인 그곳을 막 지나치려 할 때, 가게 안 쪽에 불이 켜졌다. 뒤 돌아보니 금세 꺼져버렸다. 뭐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아무래도 감기가 더 심해진 것 같다. 며칠을 질질 끌더니 결국 몸살이 되었다. 집에서 끙끙 앓다가 도저히 안될 것 같아서 두껍게 옷을 껴입고 집을 나섰다. 다행히 오늘은 금요일이라 근처 내과나 이비인후과가 문을 열었을 것이다. 오후 2시가 넘었다. 집 앞 골목에 있는 그 가게는 여전히 인기척이 없다. 낮에는 공사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용한 것이 이상하게 신경이 쓰인다. 병원에는 감기에 걸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로 꽉 찼다. 아이들이 시끄럽다. 머리가 더 아파온다. 접수를 하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의사를 만났다. 감기 몸살. 다행히 코로나와 독감 검사는 음성이었다. 밥을 잘 챙겨 먹고 따뜻하게 하고 자라는 말과 물을 자주 마시라는 말을 덧붙이고 처방전을 주었다. 고작 몇 천 원의 진료비를 내고 병원 문밖을 나서면서 일 년에 한두 번 오는 병원이지만,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다. 매달 월급에서 꼬박 빠져나가는 금액은 까맣게 잊은 채 말이다. 늘 그렇듯이 병원이 위치한 건물의 일층에는 약국이 있다. 같은 이름의 병원과 약국이다. 아무래도 약국의 원장과 병원의 원장은 친인척이거나 부부이거나 혹은 그 비슷한 관계일 것 같다. 약국 안에 들어서니 나와 마찬가지로 한 손에는 같은 병원의 이름이 찍힌 처방전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아이들을 손을 잡고 서 있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저기 기침소리와 북적이는 사람들 늘 그렇듯 약국의 약 진열대 아래칸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얄궂은 장난감이 달린 비타민이 진열되어 있다. 만지작 거리려는 아이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 안된다고 타이르는 부모님들까지 약국 안이 너무 시끄럽다. 조제된 약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조차도 이 시끄러운 곳에서 본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약사들은 더욱 크게 이름을 부르고 있다. 마치 시장이 연상되는 약국에서 겨우 약을 받아 들고, 간단한 복용 시 주의사항을 듣고서야 건물을 나설 수 있었다.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고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서 약을 사는 이 간단한 과정을 위해 나는 거의 2시간이 넘는 되는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4시가 훌쩍 넘어 5시가 다 되었다. 찬바람을 쐬면 더 심해질 것 같은 감기몸살이 병원의 소독약 냄새를 맡아서 인지 조금은 가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조금은 덜 해졌으니 배가 고파지는 거겠지? 빈속을 달래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죽 한 그릇을 포장했다. 왠지 집에서 조용히 먹고 싶었다. 시린 손 때문에 티셔츠의 끝을 쭉 빼서 손등을 가린다. 잔뜩 웅크린 채로 재빨리 걸어 골목으로 들어섰다. 왠지 낯선 골목길, 매일 지나치는 골목길인데 낯설다. 왜일까? 집 앞까지 다다랐을 때,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인기척이 없고, coming soon이라는 글자가 크게 쓰인 보라색 천으로 가려진 그 가게에 보라색 천이 사라지고, 가게 안에서 밝은 불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궁금하다. 가까이 가본다. 여전히 인기척이 없다. 문 앞에는 open이라는 푯말이 크게 걸려 있다. 메뉴판도 세워져 있다. 메뉴에는 only, today’s dinner with wine이라는 글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의 그림과 함께 있다. 커다란 문과 길가로 난 큰 창은 가게 전체를 가리고 있던 보라색보다 훨씬 두껍고 짙은 보라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서 안쪽을 완벽하게 자세히는 볼 수가 없다. 이상하게 몸이 따스해진다. ’딸랑’ 나도 모르게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다. 천장에 달린 화려한 샹들리에 만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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