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챙이국수
내가 기억하는 여름은 신나는 방학이 있고 온 동네를 뛰어다닐 수 있는 그런 계절이다. 학교에서 나눠준 탐구생활을 성격이 급한 나는 방학식 날 교실 뒷자리에 앉아 다 읽어버렸고, 그림일기라는 숙제가 있었냐는 듯이 그저 놀기만 했던 그런 방학이 나의 여름이었다. 동생들과 곤충 채집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작은 플라스틱 가방을 들고 잠자리채를 들고 온 둑방 길로 메뚜기를 잡으러 다녔다. 나는 겁이 많아 메뚜기를 잘 잡지 못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분명 탐구생활에는 알코올로 솜으로 어찌어찌해서 잡은 곤충을 나무틀에 핀으로 고정을 하고 뭐 그런 복잡한 설명이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게 뭔지 몰랐고 그저 뛰어다니면서 메뚜기와 방아깨비를 잡는 게 곤충 채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나 잔인한 방학숙제였다.
그날도 메뚜기와 방아깨비를 몇 마리 잡아 마당 한 구석에 놓아두고 늘 좋아하던 토요명화를 기다렸다. 어릴 적 나는 토요명화와 주말의 명화를 꼭 챙겨보는 바람직하지 못한 어린이였다. 곤충채집을 한 그날의 영화의 제목은 ‘개미왕국’이었고 (아마도 번역이 된 제목일 것으로 추정된다.) 어느 섬에 관광객들이 들어갔다가 근처 공장에서 버린 화학약품을 먹은 개미들이 집채만큼 이나 커져 사람을 먹어버리는 그런 영화였다. 그 날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가 잡아온 메뚜기와 방아깨비가 밤 사이 커져서 나를 공격할 것 같았다. 밤새 그들의 안녕을 기원했고 미안하다고 되뇌었다. 날이 밝자마자 마당으로 뛰어나가 조금은 기운이 없어진 그들을 조그만 채집통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그 날이 내 인생에서 곤충 채집을 한 마지막 날이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기억 속의 '개미왕국'을 검색해 포스터를 찾았다! 장르가 무려 [SF, 공포] 역시 바람직하지 못한 어린이였군.
늘 새롭지만 같았던 여름의 어느 날 동생들이랑 땀이 흠뻑 젖도록 동네를 뛰어다니며 놀다 잠깐 물 마시러 들른 집은 분주했다. 할아버지는 새로이 아기밀 통(지금도 출시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어릴 적 내가 먹었던 분유)에 못질을 해서 올해 쓸 올챙이국수 틀을 만드셨고 할머니와 엄마는 뒤 안에서 커다란 냄비에 옥수수가루를 열심히 끓이고 있었다. 할아버지 표 올챙이국수 틀이 완성이 되어 갈 때쯤이면 아빠는 커다란 고무 대야에 찬물을 받아 준비했고 할머니와 엄마는 펄펄 끓는 옥수수죽을 퍼 담아와 올챙이국수 틀에 부었다. 아주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반죽 위로 할아버지가 올챙이국수 틀에 꼭 맡게 만들어준 나무 누름을 꾸욱 눌렀다. 옥수수 반죽은 쭈우욱 이어지지 못하고 뚝뚝 끊겨 찬 물 위로 떨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올챙이국수를 할머니는 채로 떠 올려 다른 찬물에 담았다. 아빠가 뜨거운 반죽을 떠 올챙이국수 틀에 담으면 엄마는 손과 나무 누름을 적셔가며 또 꾹 눌러 올챙이국수를 만들어 냈다. 아주 시끄러운 여름 오후였고 우리들은 그 옆에 옹기종기 쭈그리고 앉아 올챙이 국수가 만들어지는 모양을 지켜보며 몰래몰래 손으로 올챙이국수를 건져 먹었다. 장난은 덤으로.
모든 게 준비가 되면, 엄마는 양념장을 만들었고 그날은 다른 별다른 반찬 없이 그저 엄마표 정선 갓김치와 맛있는 양념장을 솔솔 올린 올챙이국수 한 사발로 저녁 밥상이 꽉 찼다. 고소하고 짭짤한 그 맛은 나에게는 여름이 또다시 찾아왔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여름이 지나고 있었다.
함씨네 비법 아닌 비법 - 옥수수 죽은 정말 뜨거울 때 부어야 굳지 않음 그리고 꼭 고명은 정선 갓김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