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배추 샌드위치
어느 날 내가 리틀 포레스트를 무한 반복 재생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의 스트레스 지수가 가득 차고도 넘치려고 찰랑찰랑하고 있다는 신호다. 리틀 포레스트 [여름]의 양배추 샌드위치는 나의 여름 메뉴이기도 하다.
우리 현자 씨는 아주 일찍 결혼을 했다. 그리고 이듬해 나를 낳았다. 현자 씨와 나는 고작 스물한 살 차이. 그래서 내가 19살이던 고3이 되었을 때, 현자 씨는 겨우 마흔이 되었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린 나이에 고3 수험생의 엄마라니!
내 세포가 활발히 자라고 있던 어린 시절에, 우리 현자 씨도 어렸다. 유난히 빵을 좋아하는 현자 씨는 시내에 (시골은 "시내"라는 곳이 존재한다. 서울 사람들은 모르는 "시내") 나갔다 올 때면, 맘모스 빵을 겨울에는 붕어빵을 사서 자전거 앞 바구니에 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세 남매는 현자 씨를 오매불망 기다렸고, 현자 씨의 자전거 소리가 골목 시작부터 들려오면 신이 났다. 현자 씨는 환한 얼굴로 "빵 먹자~"며 마당으로 들어왔다.
시골의 여름은 더웠다. 그 시절 누구나 그렇듯 파란 날개가 윙윙 돌아가는 선풍기로 무더운 여름을 났다. 물론 시원한 계곡이 많은 강원도였지만, 매일 계곡으로 놀러 가지는 않았다. 더운 여름이면 현자 씨도 뜨거운 불 앞에서 점심밥을 짓는 것이 힘들었고 우리 셋도 더운밥을 먹는 것이 힘들었다.
그런 날이면 현자 씨는 양배추 샌드위치를 만들어줬다. 커다란 양푼에 양배추, 당근, 그리고 양파를 채쳐서 넣고 마요네즈를 듬뿍 뿌려 버무려놓고 식빵 한 줄을 열어 식빵 한 장에 속을 꾹꾹 눌러 올리고 식빵 뚜껑을 덮어 첫째인 나부터 하나씩 만들어줬다. 그리고 네 번째 양배추 샌드위치는 우리 현자 씨가 앙 물었다. 단지 양배추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이는 순간에도 엄마는 누나가 남동생들의 기에 죽을까 걱정되었는지 남매들의 서열을 지켜줬다. 엄마의 걱정과는 달리 나는 연구실 후배들이 무심코 [형]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누나로 자랐다.
한 번도 다 만들어 접시에 내어오지 않았다. 현자 씨는 채친 채소를 가득 담은 양푼과 마요네즈 통 그리고 식빵 한 줄을 들고 마루로 왔고, 그러면 우리 셋은 지금 다시 보면 작겠지만 그때는 아주 커다란 양푼에 순서대로 둘러앉아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목이 빠져라 보고 있었다. 물론 수다쟁이 함 씨들이 조용히 있지는 않고 쉼 없이 떠들어 댔다. 어렸던 나는 양파가 너무 매웠다.
어른의 입맛에는 알싸한 양파가 간간히 씹혀줘야 느끼한 맛을 잡아주지만, 고작 10살 정도였던 나는 양파가 씹힐 때마다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현자 씨는 단 한 번도 양파를 빼 준 적이 없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함께 하지 않는 식사는 늘 현자 씨 위주의 메뉴 선정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 뒤돌아 보면 가장 옳은 선택이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고, 10살이면 (물론 동생들은 더 어렸지만) 간간히 생양파 정도는 씹어줘도 되는 나이니까.
양배추 샌드위치는 나에게는 여름 방학을 알리는 신호였다.
우리 세 남매는 엄마를 가끔 현자 씨 또 가끔은 장여사라고 부른다. "현자"라는 엄마의 이름보다는 엄마, 며느리, 누구의 아내로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 우리가 가끔 엄마의 이름을 불러준다.
은근 엄마가 좋아한다! 진짜로!
함씨네 비법 아닌 비법 - 양파는 골라내지 못하게 잘게 다져서 조금만 넣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