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코 Mar 09. 2020

그래, 아프니까 청춘이지

꿈과 현실의 구렁텅이

 나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것이 분명한 아이였다. 게다가 그것을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집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어 부모님은 꽤나 힘이 드셨을테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이곳저곳 집을 옮겨 다니면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 이라고는 음악,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피아노를 치면서 마음을 달래는 일이었다. 음악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해 부모님께서는 반대하셨지만, 나는 꼭 해야겠다며 졸라 댔다. 빚더미에 앉았는데 딸내미 음악공부 시키냐고 손가락질 받은 우리 부모님은 잘못이 없다. 우리 집의 가난은 냉정하게 말해서 음악을 하겠다고 빡빡 우긴 나 때문이었다.     

 

 음악을 한다 하면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집안이겠거니 생각하지만, 음악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막상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음악을 하고 싶지만,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적어도 나는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대학교에서도 음악 전공을 하고 독일까지 다녀왔으니, 상대적인 개념으로는 나는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욕심 많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니 가난의 체감지수가 높았던 것이라 생각이 든다. 이십 대가 다 지나가고 서른 중반이 다 되어가는 이 지점에서 과거를 돌이켜보면 나는 지지리도 궁상맞게 살았다. 주변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독일을 다녀오기 전까지의 나는 삶에서 나의 꿈이 전부였고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삶의 모습으로 성공하는 것이 효도하는 길이고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준 분들께 보답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느낌이 죽기보다 싫었고,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나는 항상 두 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연습실에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 댔다. 일주일에 한 번 받는 레슨에 더 집중해야 했고, 하나라도 놓치는 순간엔 나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었다. 나도 친구들처럼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내 방에서 달달한 음료를 마시면서 연습하고 싶었다. 학창 시절 그게 늘 부러웠다. 업 라이트 피아노가 집에 있었지만, 나는 그것에 감사할 줄 몰랐다. 그래서인지 내 음악은 늘 조급했다. 늘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우리 집에는 그랜드 피아노도 없다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서 집착적으로 좋은 피아노가 있는 연습실을 잡아 연습을 했다. 예술 고등학교를 다니는 3년 동안 나는 수업 시작 전, 1시간~1시간 반 정도 학교 연습실에서 새벽 연습을 했었다. 그리고 수업이 마치고는 연습실 문 닫는 밤늦은 시간까지 또 연습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새벽이고 밤이고 어머니께서는 나를 픽업해 주셨다. 나의 부모님은 경제적으로 많은 것을 지원해주시지는 못했지만 힘이 닿는 범위에서 보탬이 되어 주시려 노력하셨다. 그렇게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하니 음악 선생님들과 친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연습실을 관리하는 아저씨랑도 친해졌다. 매일 절전하러 다니는 아저씨라 해서 우리는 절전 아저씨라고 불렀는데, 나는 그랜드 피아노에서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절전 아저씨께 홀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에서 조금만 연습하면 안 되겠냐고 말 같지 도 않은 앙탈을 부렸다. 그 앙탈이 귀여웠는지, 징그러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절전 아저씨께서는 그런 식으로 나에게 꽤 많이 그랜드 피아노에서 연주해 볼 기회를 주셨다. 비록 텅 빈 홀이었지만, 나는 그랜드 피아노에서 풍기는 특유의 나무향기와 건반에 손끝이 닿을 때마다 움직이는 해머들을 따라 의식적으로 눈동자를 왔다 갔다 하며 내가 연주하는 곡의 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중학교 때 뒤늦게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예술 고등학교 오디션에 합격해 입학하여 다니면서 일반 고등학교 학생들이 누리지 못하는 값진 음악교육의 혜택을 받았다.      

 

 그 덕에 어린 나이에 느끼지 않아도 될 감정들을 느끼기 시작했다. 수없이 드나드는 다른 친구들 부모님의 자동차, 그들이 입고 다니는 옷, 그들이 사는 집을 보면서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빈부의 격차에서 오는 엄청난 박탈감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 우울감이 더 깊은 내면으로 빠지게 만들어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보냈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렇지 않은 척 겉으로는 친구들과 밝게 지냈지만, 사실은 혼자 피아노 연습을 하는 시간을 더 좋아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시간만큼은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고, 공감할 수 없는 친구들과의 대화 주제 속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다. 남들보다 피아노 앞에 앉아있던 시간들이 길었던 나에게 음악은 유일한 친구였다. 그 덕분인지 나는 예술 고등학교에서 줄곧 실기성적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수능에서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여 내가 원하는 대학교에는 가지 못했다. 그 충격으로 나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해서 오는 심리적인 불만 때문에 대학시절에도 밝게 지내지 못했다. 클래식 음악학과 특성상 비싼 학비 때문에 학비를 스스로 벌어서 대학을 다닌다는 자체도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기 위해서는 장학금을 받아야 했고 장학금을 받으려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했다. 국가장학금과 성적장학금을 번갈아 받으며 대학시절을 보냈지만, 매번 장학금을 받기란 스스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연습과 공부를 해내야 하는 나에게는 체력과 시간에 한계가 따르는 일이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한 학기에는 학자금 대출을 받았고, 한 학기 학비는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너무 힘에 부쳐 학교 다니는 것을 중단하고 싶었다. 깊어가는 우울증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나는 빚쟁이가 되는 것인데,  빚의 진한 농도에 비해 값진 교육의 혜택을 받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교수들은 다들 먹고살만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파벌싸움과 권력에 눈을 켜고 있었고, 그들의 싸움에 학생들은 희생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나에게는 그런 부정적인 것들만 자꾸 눈에 들어왔다. 학교를 때려치울 거라고 얘기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께서는 형편이 풀리면 학비를 갚아 줄 테니, 졸업은 하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우리 집은 형편이 풀리지 않았고, 나는 그 학자금을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갚아나가는 중이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바쁜 하루하루에 지치는 몸보다는 주기적으로 무너지는 마음이었다. 나는 다른 친구들과 동떨어져 있는 기분을 느꼈으며, 어느 한순간도 마음 편하게 있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독일을 가고 싶은 마음을 포기할 수가 없어 늘 꿈과 현실에서 부딪히고 싸웠다. 그때 당시 아버지의 건강악화로 집안 상황은 더 힘들어지고 있었으니, 독일을 가겠다고 하는 것은 남들에게 비난받아 마땅할 일이었다. 나에게 꿈이 없었다면 애초에 이런 내면적인 갈등도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음악을 곧 죽어도 해야겠는데 상황이 자꾸만 따라주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누구와 속 터놓고 편히 얘기할 사람도 없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혼자 생각하고, 해결하고, 결론짓고. 대학시절의 나는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끙끙거린 시간들로 기억된다. 그 시련의 시간 동안 나는 삶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하게 되었다. 삶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며, 나의 존재는 왜, 나는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식의 질문들을 끊임없이 하며 나의 내면과 싸웠다. 그 결과 나는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고 신을 진심으로 믿게 되었고, 더불어 타인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또한 힘든 시간들을 보내면서 세상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 좋을 수도, 다 나쁠 수도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이런 값진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렇게 마음고생을 했나 싶을 정도로 시련으로 인해 얻은 교훈은 내 삶에서 그 누구에게도 배울 수 없는 귀한 양분이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안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