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보통의삶

독일에서 만난 이란 사람들 (in 독일)

#할머니의 눈물

by 바코

며칠 전 지역모임에서 다문화 이주여성들의 마음속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한국으로 이주하여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하나같이 의사소통의 어려움이라고 답했다. 베트남, 캄보디아에서 온 여성들이 한국에서 문화 차이로 겪는 어려움들을 듣고 집으로 오는 길에 독일에서 만난 '이란'사람들과의 추억이 떠올랐다.


나의 피아노 소리를 유독 좋아하셨던 이란에서 온 할머니 '만자르'.


만자르를 알게 된 건 독일 교회에서이다. 예배가 끝나고 홀로 피아노 연습을 하는 나를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곤 했다. 맛있는 과자를 손에 쥐어주시며 아픈 데는 없는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자주 물었던 만자르는 하루는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내 딸 어릴 때가 생각나는구나. 나는 이란에서 독일 온 지 30년이 넘었단다. 다음 주에 시간 되면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 어때?"



"네, 좋아요. 어학원에서 알게 된 친구도 이란에서 왔는데.. 함께 가도 되나요?"


"그럼. 물론이지. 맛있는 밥해줄게."


어학원 같은 반 친구의 이름은 '레자'. 매우 똑똑한 친구였다. 레자는 이란에서 부인과 함께 독일에 온 지 몇 개월 안되었지만 독일어를 기가 막히게 빨리 습득했다. 나의 옆자리에 앉아 어설픈 독일어 실력으로 유쾌한 농담을 하곤 했었다. 희한하게도 척척 통했다. 나는 그 당시 말보다는 쓰는 것을 더 잘했었던 시기였다. 레자는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하지 못할 때 그림을 그리거나 단어 몇 개만 적어도 신통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어학원을 다니다 보면 다양한 인종이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유난히 중동지역 사람들이 많은 반에 배치가 되었던 적이 있다. 중동지역에 있는 나라에 대해서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난 이들과 한 학기를 보내면서 전쟁과 종교문제로 인한 난민들과 망명인들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레자와 나는 와인 한 병을 들고 만자르의 집을 향했다. 만만찮은 오르막길에 위치한 작은 아파트에 혼자 살고 계시는 할머니 만자르. 숨을 헥헥거리며 오르막 길을 오르고 나니 만자르는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반겼다. 집으로 들어가니 음식 냄새가 솔솔 나는 것이 한국에 계신 우리 친할머니 댁에 온 기분이 들었다.


나는 친할머니와 각별한 사이이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음악공부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나는 번번이 대학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겠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끝까지 공부하라고 응원해주시고 격려해주셨다. 그런 나에게 할머니는 내가 유학길에 오를 수 있게 적금까지 들어 도움을 주셨다.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에 할머니의 사랑을 느끼고 싶어 만자르의 초대에 선뜻 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 들어와."


나는 만자르에게 "여기... 엽서..."라며 수줍게 편지를 건넸다.


나의 짤막한 글들을 읽는 내내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문구에 '딸 호경'이라고 쓴 것을 보고서는 감동을 받은 것이다. 친할머니처럼 세심하게 챙겨주셔서 고마운 마음에 표현한 것이 만자르는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레자와 만자르는 이란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중간중간 내 이름이 들렸던 걸로 봐서는 내 얘기를 한 것이 분명한데 웃으면서 얘기하는 것을 보니 긍정의 얘기를 한 것 같다. 그들이 구사하는 이란어를 들으며 부엌에 푸짐하게 차려놓은 이란 전통음식들을 보고 있으니 이란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쌀이 있는 음식을 먹으니, 반가운 마음에 젓가락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배가 터지도록 먹었는데도 자꾸만 더 먹으라고 하는 만자르의 말에 웃으며 볼록 나온 나의 배를 보여줬더니 두 사람은 깔깔댔다.


집안 곳곳에 걸려있는 액자들을 보니 만자르에겐 딸과 아들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할아버지 사진은 있는데 할아버지가 집에 계시지 않는 걸 보아하니 사연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가족 얘기를 물어보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실례 이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사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나에게 만자르는 담담하게 얘기했다.


30년 전 남편과 함께 이란을 떠나 독일로 왔어.
독일에서 딸과 아들을 낳고 그 아이들이 커서 지금은 시집 장가 다 갔지.
나에게는 손녀딸도 있단다.
여기 이 사진 속 꼬마 아이가 내 손녀딸이란다.


"우와. 너무 예쁘네요."


"독일은 어떤 계기로 오셨나요?"


"이란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믿음 생활을 하는데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어 독일로 오게 되었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레자는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저도 그래요. 같은 이유로 그곳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부인과 함께 독일로 오게 되었어요."


나는 레자에게 물었다.


"그럼 이란으로 다시 어제 돌아갈 계획이야?"


"돌아가지 않을 거야. 아니, 돌아갈 수 없어."


이들을 이란에서 독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만자르는 이주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레자는 정착을 막 시작하는 단계였다. 만자르의 남편은 평생 고생을 너무 많이 한 탓인지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독일에서 태어나 자란 만자르의 아들과 딸을 독일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며 이란어는 듣고 말하는 것만 가능하고 쓰기 읽기는 하지 못한다고 했다.


레자는 아내를 책임져야 하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면 빨리 독일어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하며 매사에 열심히였다. 내가 하는 독일 생활과 그들의 독일에서의 삶을 달랐다. 나에게는 힘들면 돌아올 수 있는 모국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모국이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만약, 그들에게 당면한 현실이 나에게도 일어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리까. 쉽지 않은 문제임은 확실한 것 같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을 해보지 할머니의 잦은 눈물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만자르는 나를 본인의 친딸처럼 챙겨주었다. 만자르의 이웃이었던 독일 아주머니와 함께 맛있는 요리를 해 먹고 와인을 마시며 하룻밤을 그 집에서 묵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부엌 한편에 이불을 깔고 주무시고, 나를 침대에서 편히 자게 한 할머니 만자르.


그저 나를 챙겨주는 것에 기뻐하셨던..

일을 많이 해 꽉 뭉쳐있던 어깨를 주물러 드릴 때마다 오히려 손이 왜 이렇게 차냐며, 차가운 내 손을 걱정해

주셨던 할머니 만자르.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을 레자.


그들의 삶을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따뜻한 마음이 오고 갔던 그들과의 추억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또한 중동지역의 전쟁이나 난민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혹시 나와 함께 했던 어학원 친구들의 지인이나 가족들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뉴스 화면을 괜스레 한번 더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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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연재하면서 나는 댓글로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그들과의 추억을 공유하고 싶었던 나의 마음과는 달리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범죄와 관련하여 세계적 이슈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며 이주민의 수용을 멈춰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독일 자체의 고민은 국가적으로도 매우 심각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안 된다고 나에게 지적했다. 나는 그들의 잘못된 행위에 감성적으로 그들 편을 드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늘 문제가 되는 사람들 때문에 그들 전체가 판단되고, 죄 없는 사람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보고 있다. 전쟁과 난민의 문제는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하기도 하지만,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앙겔라 메르켈이 하고 있는 고민을 왜 내가 하고 있냐고 하겠지만,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관심을 꺼야 할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와 아주 연관이 없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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