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풍연 Oct 08. 2020

늙고 병들고 죽음을 대하는 방법

소설 '에브리맨'을 읽고

1. 바다


아버지 계모임을 따라 난생 처음 바다에 갔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보니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습니다.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실핏줄이 터져 시커멓게 변한 남자가 누워 있습니다. 물을 많이 마신 탓인지 배가 커다랗게 부풀었고 몸은 퉁퉁 부르텄습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합니다. 물에서 건졌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수심이 깊고 물살이 빨라 더러 있는 일이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처음 간 바다에서 처음으로 죽은 사람을 봤습니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 여전히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바다를 마주섰습니다. 무한한 하늘과 무한한 바다가 무한한 대결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막힌 것 없이 탁 트였는데, 꽉 막힌 듯 답답했습니다. 높고 좁고 긴 골짜기의 부드러운 선과 그 선을 따라 오려 붙인 조각하늘이 서로를 보듬는 산골 풍경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긴장감은 두려움으로 변했습니다. 조금 전 죽은 사람 몸에서 붉은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 하늘과 바다 사이 어딘가에 둥둥 떠다닐 것 같았습니다.


<긴장> 하늘과 바다가 대결하고 있습니다.


바다에 들어갔습니다. 커다란 폐타이어에서 꺼낸 커다란 검은색 튜브를 탔습니다. 푸른 동해 바다! 튜브에 매달린 두 발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납니다. 발이 움직일 때마다 작은 물고기들이 어지럽게 따라다닙니다. 초록 물속은 맑은 하늘보다 선명해 바닥에 떨어진 바늘이라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애써 외면해 보지만 기어이 눈에 들어온 해초들이 너울너울 춤을 춥니다. 어지러웠습니다.


파도는 바닷물을 끝없이 물가로 날랐습니다. 그런데도 육지는 잠기지 않았고, 바닷물은 줄지 않았습니다. 바닷물은 땅으로 밀려오는데 튜브는 계속 바다로 밀려나갑니다. 뭍을 향해 발길질해 보지만 소용없습니다. 이대로 떠내려가면 바다 끝 낭떠러지에 떨어지겠지? 미국으로 가거나 일본에 갈지도 몰라. 북한에 가면 어떻게 하지? 그 전에 상어에게 먹히면? 흔들리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바다와 하늘과 물에 빠져 죽은 남자가 건넨 공포에 빠져들었습니다.


바스라 지는 파도 알갱이마다 오후의 햇살이 내려와 박혔습니다. 싸울 듯 노려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눈은 초점을 잃었습니다. 한데 엉켜버린 빛방울과 물방울! 경계는 흐릿해지고, 바다도 하늘도 바다와 하늘의 대결도 죽은 사람에게서 빠져나온 붉은 피도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몽롱하게 한참을 출렁이다 아버지에게 끌려 물가로 나오곤 했습니다. 극성스러운 모래를 털어내며 가파른 모래언덕을 엉금엉금 기어올랐습니다. 그리고는 벌렁 드러누워 입술에 묻어나는 짠물을 맛보았습니다.


아홉 살 되던 해 여름이었습니다. 죽음과의 만남은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죽음만큼이나 갑작스러웠고 하늘과 바다의 대결만큼이나 숨 막혔고 속 물결 따라 일렁이는 해초만큼이나 어지러웠고 엉켜버린 빛방울과 물방울처럼 몽롱했습니다. 그리고 줄어들지 않는 바다와 잠기지 않는 모래언덕과 입술을 적시는 뜨거운 짠맛과 함께 머릿속에 저장되었습니다.


죽음과의 만남은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죽음만큼이나 갑작스러웠고 하늘과 바다의 대결만큼이나 숨 막혔고 속 물결 따라 일렁이는 해초만큼이나 어지러웠고 엉켜버린 빛방울과 물방울처럼 몽롱했습니다.

2. “무한한 무(無)”


<에브리맨> 미국 작가 필립로스의 소설입니다.

40년 전 일을 떠올린 건 Philip Roth의 소설 『Everyman』을 읽으면서입니다. “초연한 척하지도 않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고, 어떤 감상에도 빠지지(역자 후기)” 않은 죽음에 관한 기록을 보며 그 때 바다에 빠져 죽은 남자가 생각났습니다. 그의 죽음은 어땠을까? 건장한 젊은 남자는 바다에 들어갈 때까지, 아니 바다에 들어가서도 자기가 죽을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마지막 순간 머릿속에는 무엇이 스쳐갔을까?


소설에서는 살아있는 것을 “충만함” 이자 “모든 것”이라 했습니다. 죽음은, 없음과 “무한한 무(無)”입니다. 죽음과 함께 주인공은 없어졌고, 있음에서 풀려났고,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존재의 사라짐, 모든 것이었다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 절대 유(有)한 존재가 절대 무(無)한 부존재가 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환한 대낮, 블랙아웃으로 한순간에 빛이 사라집니다.


<대학살>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죽음에 이르는 외나무다리인 “노년은 대학살”이자 “체계적으로 파괴”되는 과정으로 묘사됩니다. 하루하루 허물어지는 자신을 인정하기 싫지만 소용없습니다. 숨 쉴 때 마다 탱크 탑 속에 감춰진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젊은 여자에게 수작을 걸어보지만, 현실파악 못한 자아가 저지른 초라한 발악에 불과했습니다. 육체와 정신을 잠식하는 변화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것, 회한에 찬 채 지난날을 돌아보는 것 외에 노년의 삶이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해. 버티고 서서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다른 방법이 없어.” 딸은 어린 시절 들은 말을 죽은 아버지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받아들이세요> "현실을 다시 만들수는 없어요. 그냥 오는 데로 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데로 받아들이세요"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늙고 병든 남자의 분노와 갈등과 허무와  고독을 그립니다. 그래서 “섬뜩하고 무시무시(역자 후기)”합니다. 다른 등장인물과 달리 주인공에게 끝내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 “그”로 일관한 작가는 교묘한 상징체계를 통해 모든 보통사람(Everyman)은 그렇게 늙고 그렇게 병들고 그렇게 죽는다고 말합니다. Everyman(보통사람이라는 뜻)은 아버지의 보석가게 이름인데, 기억 속에서 그의 삶이 시작되는 시간적 공간적 무대이면서 평생을 지배하는 정서의 원형입니다. “Everyman”은 주인공 자체이자 모든 보통사람을 대변합니다.


과연 그럴까? 살아있을 때는 모든 것이었다가 죽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릴까? 하늘과 바다의 양보 없는 대결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삶과 죽음을 흑과 백처럼 명백하게 갈라놓고 봐야 할까? 노인의 삶에는 퇴화와 질병과 죽음에 맞서 가망 없는 전쟁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을까? 모래시계의 좁은 구멍으로 모래가 빠져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게 남아 있는 삶의 전부라면, 끔찍합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처음 책을 읽을 때는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습니다. 역주행과 정주행을 반복하는 전개방식도 혼란스러웠습니다. 두 번째 읽을 때는 무서웠습니다. 삶과 죽음의 강렬한 대비에 심장이 물렁해지고 온몸의 털이 흔들렸습니다. 타인의 삶과 죽음을 관찰하는 내가 아니라 죽어가는 주인공에 동화되어가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나의 죽음, 멀리서 혹은 코앞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생의 마지막 출구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설 때 내 모습은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지금껏 접한 죽음이 타인의 죽음이었다면 『Everyman』은 나의 죽음을 현실로 데려왔습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잊고 있었는데, 40년 전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 남자처럼 죽음은 갑작스럽게 현재진행형이 되었습니다.


지금껏 접한 죽음이 타인의 죽음이었다면 『Everyman』은 나의 죽음을 현실로 데려왔습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잊고 있었는데, 40년 전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 남자처럼 죽음은 갑작스럽게 현재진행형이 되었습니다.

3. 존재론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에 따르면 “유럽 근대사의 구성원리”는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개별 존재에 실체성(實體性)을 부여”합니다. 실체성을 부여받은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원리”를 갖습니다. 여기서 개별적 존재는 개인, 집단, 국가 등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단위를 말합니다.


동양사회의 관계론적 사고를 강조하기 위해 언급한 말이지만 존재론을 통해 『Everyman』이 죽음을 다룬 방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Philip Roth는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이고 그의 “작품은 현대 미국사회와 보편적 인간의 삶을 그려내며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됩니다. 현대 미국과 미국인, 나아가 서구사회와 서구인이 그의 관심사입니다. 『Everyman』도 뉴욕과 주변도시를 무대로 합니다.


<존재론> 동양사회의 관계론적 사고와 비교할 때 서양사회는 "존재론적" 사고가 지배합니다.

존재론에서 살아있는 개인은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단위이자 세계를 인식하는 고유하고 유일한 주체입니다. 살아있는 것을 멈추는 죽음은 인식 주체가 소멸하는 과정일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인식 대상, 즉 세상도 같이 사라집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남은 세상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삶과 죽음을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 절대 유(有)와 절대 무(無)로 대비하는 것은 존재론의 당연한 귀결입니다. 또 한 가지, 자기증식을 운동원리로 하는 모든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소멸, 즉 죽음에 극단적으로 저항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견딜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을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 절대 유(有)와 절대 무(無)로 대비하는 것은 존재론의 당연한 귀결입니다.

소설 『Everyman』은 이런 죽음을 다룹니다. 늙고 병들어 죽음의 그림자에 발이 닿자 주인공은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절대 무(無)의 고통과 분노가 엄습합니다. 타협은 없습니다. 거기에 지독한 소외가 덧붙여집니다. 은퇴와 함께 그는 그를 규정짓던 모든 사회적 관계로부터 격리되었고, 세 번에 걸친 결혼과 이혼으로 가족들과도 멀어졌습니다, 쓸쓸했습니다. 곁을 지켜주던 형과 딸을 멀리하고 나자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지막 마취주사를 맞을 때 그는 혼자였습니다.


“죽음을 피하는 것이 그의 삶에서 중심적인 일이 되었고 육체의 쇠퇴가 그의 이야기의 전부”가 된 말년에는 지난 삶에 대한 조용한 회고도, 가족 이웃과 나누는 잔잔한 사랑도, 너울대는 파도를 바라보는 편안한 일상도, 최후의 순간에 대한 차분한 기다림도 없었습니다. 일생을 꿈꿔온 화가로서의 삶조차도 그를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그릇된 지난날에 대한 회한과 죽음 외에 남아 있는 것이 없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세상 가운데 홀로 던져진 외로움만이 매 순간을 지배했습니다. 무너지는 존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마지막 수술을 앞두고 찾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에서 그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백골이 된 부모와 대화를 나누며 좀체 그곳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4. 최후의 사형수


죽음을 예상하지 못한 건 작가의 마지막 배려였습니다. “불길한 운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느낌”이었기에 수술에 앞서 그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충만해질 것을 기대하며 편안하게 주사를 맞았고, 마취상태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무의식 상태에서의 죽음. 그는 코앞에 닥친 죽음이 몰고 올 극한의 공포와 자기분열 그리고 육체적 고통을 피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한 때 사랑했던 혹은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지 못하는 대가를 치렀지만, 그건 남겨진 이들의 몫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과 달리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40년 전 동해바다에 빠진 젊은 남자는 숨이 가빠오고 배가 부풀어오는 고통을 처음에는 또렷하게, 나중에는 흐릿해져가는 의식으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1997년 12월 30일 형이 집행된 우리나라 마지막 사형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권력에 의해 죽음이 확정된 후, 예고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그는 매 순간 죽음과 대적해야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형장에서 보여준 그의 태도입니다. “‘웃으면서 가겠습니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오히려 옆에 서있던 교도관이 눈물을 쏟았다. 사형수가 교도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도 웃으면서 가는데 교도관님이 왜 눈물을 흘리세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형장에서 보여준 그의 태도입니다. “웃으면서 가겠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그는 대법원 확정판결 때까지 일관되게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최후의 육성으로 죄를 부인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웃음을 이야기했습니다. 눈물 흘리는 교도관을 위로하며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발판이 꺼지는 마지막 순간에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복면을 뒤집어쓰기 직전까지는 그렇게 담담했습니다.


* 17.12.26, 동아일보, “"웃으며 가겠습니다" 마지막 말에 형집행 교도관 눈물 쏟아”


심리상태가 시시콜콜 파헤쳐진 『Everyman』의 주인공과 달리 사형수인 그가 미결수로서의 긴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가 다르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호기롭게 “보통사람”이라는 제목을 뽑았지만, 모든 사람이 소설 속 주인공처럼 죽음과 가망 없는 대결을 하는 건 아닙니다. 스콧 니어링은 몸에 이상이 생기자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의 순간을 선택했습니다. 항암 치료를 거부한 이반 일리치는 끝까지 진통제로 버티다 생을 마감했습니다. 2018년 2월 연명의료결정법 시행을 전후로 국내에서도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차분하게 죽음을 받아들인 사례가 여럿 소개되었습니다. Philip Roth의 일반화 시도는 지나친 것으로 보입니다.


5. 나비의 꿈


깊은 산속, 한밤중에 홀로 밖에 서 있으면 사위(四圍)는 무겁게 가라앉습니다. 먼 길을 달려온 별빛은 천지간에 차분히 내려앉은 후에 어둠속으로 녹아듭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소리를 잠근 시간, 바람소리와 물소리만이 간간히 적막을 깨웁니다. 산짐승이라도 나타날까 싶어 숨소리조차 경계하며 온몸의 감각을 집중시킵니다. 나뭇잎 바스라 지는 소리에도 머리칼이 곧추섭니다. 긴장감이 높아진 몸은 아드레날린을 대량으로 방출합니다.


<밤> 낮에는 잊고 있던 우주가 밤이 되어 별과 달이 나타나면 현실이 됩니다. 별빛은 우주를 데려오는 전령입니다.


서늘한 기운이 한바탕 정수리를 스쳐 지나간 뒤에 비로소 고개를 듭니다. 하늘과 산과 나무와 바위를 바라봅니다. 숨어들어가는 별빛도 기어이 찾아내 망막에 담습니다. 별빛은 우주를 데려오는 전령입니다. 밝은 대낮에는 느끼지 못하다가도 밤이 되어 별빛이 내려오면 우주는 현실이 됩니다. 은하수에 빠져 허우적대다 눈을 감으면 시신경은 우주로 확장됩니다. 전지자(全知者)의 눈으로 내가 서 있는 산골짜기와 나를 바라봅니다. 시야는 점점 넓어져 육지와 바다가 눈에 들어오더니 이윽고 푸른 별 지구가 보입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어지럽게 오가고 태양계는 더 큰 은하로 빨려 들어갑니다.


전후도 좌우도 위아래도 없는 무한공간에서 전지자의 망원렌즈를 다시 장착합니다. 점으로 환원된 별들 사이에서 어렵게 지구를 찾아내고 강력한 줌을 잡아당깁니다. 한참을 씨름해 어느 골짜기에서 고개를 쳐든 채 눈을 감고 서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무수한 점들을 흩뿌려 놓은 우주공간, 그 광활한 공간의 한 점, 그 한 점의 어느 곳에 내가 서 있습니다.


나는 우주공간으로 무한하게 확장되다가 어느 순간 티끌로 소실됩니다. 티끌! 나와 작은 벼룩과 냄새나는 노린재와 시커먼 멧돼지와 빛 고운 진달래와 끈질긴 바랭이 풀과 펑퍼짐한 너럭바위와 길가 흙먼지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인간만 해도 74억6천 만 명인 지구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생물과 미생물과 무생물이 담겨있습니다.


<나비의 꿈>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알 수 없습니다.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


나른한 오후에 낮잠을 잡니다.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날아다닙니다. 꿈속 시간은 너무나 꿈결 같아 나를 잊고 온전히 나비가 됩니다. 그러다 깨어보니 다시 내가 되었습니다. 아직 몽롱한 상태, 내가 잠이 들어 나비 꿈을 꾼 건지, 나비가 잠깐 동안 내가 되는 꿈을 꾸는 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장자(莊子) 나비의 꿈(胡蝶之夢)은 개별 존재를 구분 짓는 덧없음을 이야기합니다.


장자(莊子) 나비의 꿈(胡蝶之夢)은 개별 존재를 구분 짓는 덧없음을 이야기합니다.

시각을 우주로 넓힌 것처럼 시간 영역을 과거와 미래로 확장해보면 더 막막합니다. 시간 역시 경계가 없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무한한 시간대에서 내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인간의 의식으로 머무는 시간은 아주 잠깐입니다. 나를 주장하고 나를 중심으로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별하기에는 너무 찰나입니다.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 로구나" 서산대사가 자신의 영정에 쓴 시는 80년 시차를 두고 나와 타자를 구별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묻습니다. 무한 시공(時空)에서 보면 개별 존재를 절대적 가치로 상정하는 존재론은 힘을 얻기 어렵습니다.


6. 밀어내기


자식과 손자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근처에 사는 동생도 소식을 듣고 도착했습니다. 방바닥에 누운 할아버지 입에서는 가끔 거품이 끓어올랐고 숨소리는 거칠었습니다. 어른들 틈에 끼어있던 나는 맏손자 자격으로 할아버지 옆으로 불려나왔습니다. 누군가 나더러 “할아버지” 하고 불러보라고 했습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웅얼거리듯 겨우 한두 번 부르고 손을 잡는 사이에 할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수 지어 오랫동안 살아 온 집에서 일가와 식솔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할아버지 옆, 방 한가운데 앉아 있었습니다. 어른들의 곡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같이 울어야 한다는 말에 소리를 내어 봤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눈물도 나지 않아 억지로 쥐어짜야 했습니다. 빈소는 할아버지가 누워있던 바로 그 자리에 차려졌고, 시신은 병풍 뒤에서 3일을 더 보낸 후 자리를 떴습니다. 할아버지는 내가 두 번째 본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열 살 되던 해입니다.


생활 가까이 있던, 아니 생활 자체였던 죽음은 이제 밀려났습니다. 희로애락을 겪던 삶터에서 가족에게 둘러싸여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는 모습은 더 이상 없습니다. 의료시스템이 죽음을 관장하면서 환자는 의사의 판단을 기다려 망자가 되고, 상조산업이 장례를 관장하면서 유족은 상조서비스를 제공받는 고객이 되었습니다. 전국으로 혹은 글로벌로 흩어져 사는 가족들 중에는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생활 가까이 있던, 아니 생활 자체였던 죽음은 이제 밀려났습니다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합니다. 전쟁터는 말할 것도 없고 평화로운 도시의 안락한 가정에 이르기까지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디에나 있나 있는 죽음을 아무 곳에도 없는 것처럼 다룹니다. 철저한 보건위생 관념에 따라 사망선고와 동시에 시신은 냉동고에 밀려들어갑니다. 망자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고, 유족은 고인으로부터 유리됩니다. 아이들의 눈은 설사 직계가족이라도 죽음으로부터 보호됩니다. 매 순간 수많은 사람이 죽음의 경계를 넘어가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리”됩니다. 밤새 어질러진 거리를 득달같이 치우고 난 다음에 맞는 아침처럼 죽음은 세상에서 제거됩니다. 산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죽음은 이처럼 터부이거나 처리해야할 위생 문제이거나 상조업의 사업대상이거나 입니다. 사자(死者)를 대하는 방법에 관한 한 우리는 존재론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무한한 절대 유(有)를 누리던 삶은 죽음과 동시에 무한한 절대 무(無)가 됩니다.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죽음은 죽은 자만의 일이 되었고 더 이상 산자의 일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에 대한 추모는 오직 정신영역에서만 나누고 유지됩니다. 나 역시 죽자마자 세상에서 제거 되리라는 생각은 『Everyman』에서처럼 죽음과 대결하고 죽음에 저항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풍조에 일조했음이 분명합니다.


7. 죽음과 함께 살아가기


죽음 자체에 의문이 든 적이 있습니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세포는 매순간 죽고 매순간 새로 만들어지는데, 왜 늙고 병들고 죽을까? 세포가 무한재생 된다면 세포로 이루어진 개체는 무한정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교체 주기가 기관마다 다른데 피는 서너 달이면 다 바뀌고, 간은 1년, 뼈는 10년, 근육은 15년이라고 합니다. 가장 긴 뇌세포는 25년입니다. 25년이면 사람 몸의 모든 부품이 신품으로 교체된다고 합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된다면 신체기능이 저하되거나 늙거나 죽을 일이 없을 것 같은데, 모든 생명체가 늙고 죽습니다.


문제는 외부변수입니다. 생명이란 외계와의 관계에 다름 아닙니다. 인간의 삶 역시 다른 인간과 다른 생명 그리고 세상과의 교류입니다. 먹이활동을 통해 생명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를 흡수하고 이렇게 충당한 에너지로 다시 생명활동에 나섭니다. 에너지 순환과정에서 개체를 죽음으로 데려가는 사고와 질병은 불가피합니다. 또 한 가지. 내 몸을 구성하는 부분으로서 세포의 생멸을 당연하게 여겼듯 나 자신이 더 큰 체계의 부분으로 생멸하는 건 아닐까? 세포 역시 더 짧은 기간을 생멸주기로 하는 부분으로 채워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태어난 나는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인도네시아 오지에 사는 어느 부족은 가족이 죽은 뒤 매장할 때까지 몇 주 혹은 몇 년을 시신과 함께 지냅니다. 집 한쪽에 모셔두고 식사를 비롯한 모든 일상생활을 같이 합니다. 때가 되면 옷을 갈아입히고 집에 찾아온 손님을 데려가 인사시킵니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것처럼 대합니다. 미라가 된 조상을 둘러싼 남은 가족의 생활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죽더라도 갑작스럽게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곳에서는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좀 더 편안하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한한 시간에서 보면 삶은 찰나에 불과합니다. 살아 있는 짧은 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동안 나는 죽어있습니다. 죽어 있는 무한한 시간과 살아있는 찰나! 죽음에 대적해 싸움을 하며 기운을 소진한다면 죽음을 향한 외통수인 삶의 모든 순간이 고통스럽고 억울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Everyman』의 주인공을 보며 심장이 물렁해진 이유입니다. 그러기에는 삶은 너무 짧습니다. 분리할 수 없는 삶의 동반자로서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찰나를 충실하게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름 석 자에 나를 가두는 것은 존재론의 감옥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나를 나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구분 짓고자 하는 건 찰나의 삶으로 영원한 죽음에 맞서는 시도입니다. 애초에 싸움이 안됩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과 생명 없는 모든 것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면 경계는 흐릿해지고 차이는 없어집니다. 초점을 놓친 렌즈에 잡힌 피사체는 몽환적이고 아름답습니다. 고화질을 최고로 삼는 시대지만, 가끔 아날로그 시선으로 세상을 보면서 삶의 당연한 과정인 죽음에 관대해지길 소망합니다.


<에필로그>


글을 정리하면서 『Everyman』을 한 번 더 읽었습니다. 작가는 결국 ‘관계’를 얘기하고 싶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라한 노년을 보내고 가망 없는 싸움을 하고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건 주인공을 둘러싼 ‘관계’가 해체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지위가 관계의 전부인 사회에서 은퇴한다는 것은 사회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가정마저 파탄 낸 그가 기댈 곳은 없었고, 그래서 더욱 절망적이고 더욱 쓸쓸했습니다.


무성했던 여름날 잎사귀를 모두 떨어뜨리고 난 겨울나무처럼, 진실한 순간 우리에겐 무엇이 남을까? 그 순간 우리는 무엇을 필요로 할까? 어쩌면, 육체와 정신을 보존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제외한 모든 게 허상이 아닐까? 편의를 높이기 위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인류가 가꿔온 것이 최후의 순간엔 힘을 쓰지 못합니다. 손을 잡아 줄 가족, 눈물 흘려줄 이웃, 미소를 띠고 배웅해 줄 친구가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일지 모릅니다.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주제넘게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아픈 기억을 되살릴까 걱정도 됩니다. 그러던 차에 일본 드라마 '오싱'의 작가 하시다 스가코 씨의 인터뷰 기사*를 접했습니다. 93세 노작가는 “죽음과 마주하는 것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삶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18.3.30, 동아일보, “남에게 폐 끼치기전, 죽는 방법 정도는 스스로 고를 수 있어야”


#에브리맨 #필립로스 #강의 #신영복 #존재론 #나비의꿈 #장자 #하시다스가코






작가의 이전글 神이 머물다 간 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