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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Feb 23. 2021

벌에게 벌(罰)을 받다

벌에 쏘였습니다. 퉁퉁 불어터진 팔이 조선무마냥 굵직합니다. 포동한 갓난아기 팔뚝처럼 보기 좋지만 실상은 고통스럽습니다. 가렵고 욱지근합니다. 화끈거려 잠도 힘듭니다. 먹은지 하루가 되었지만 보건소 약은 아직 벌독을 제압하지 못합니다.

벌에 쏘이고 나서 팔 전체가 퉁퉁 부었습니다.


나를 공격한 벌을 생각합니다. 안개비 날리는 여름날 아침, 비를 피해 벌도 날개를 쉬고 있었습니다. 풀잎 아래서 혹은 자기집 처마 밑에서 비구경 하며 절정의 여름을 즐깁니다. 몽환적인 안개에 깜빡 잠이 드는 순간 요란한 엔진음과 함께 느닷없이 예초기 칼날이 들이닥칩니다.


몸뚱이를 의탁하고 있던 풀이 잘려나가고 공들여 지은 집도 순식간에 풍비박산납니다. 날개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벌의 분노 게이지는 하늘을 찌릅니다. 휴식을 방해한 혹은 집을 부서뜨린 검은 동물을 찾았습니다. 오장육부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린 독침 한방을 놓습니다. 얇은 여름 티셔츠는 분노로 독이 잔뜩 오른 침을 꽂는 데 아무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팔뚝의 고통은 벌의 생존과 번식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한 결과입니다. 한마디로 '벌(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벌이 받은 위협의 절박함에 비추어 본다면 내가 받은 '벌'은 가볍습니다. 이삼일 고생하면 아무일 없었다는 듯 또다시 예초기를 휘두를 게 틀림없습니다. 인간 영역에 무단침입한 대가로 무수히 많은 생명을 빼앗거나 거주지를 파괴합니다.


이삼일 갈것도 없습니다. 나는 불어터진 팔뚝을 하고서도 풀베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허리 잘린 사마귀가 갈퀴발을 하늘로 쳐들고 마지막 떨림을 토해냅니다. 억새게 운 나쁜 무당개구리는 최후의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몸뚱아리가 반으로 잘립니다. 사슴벌레는 집게발 한쪽을 잃었습니다. 용케 목숨을 건졌지만 참나무 수액과 암컷을 향한 숫커들의 리그를 생각해 보면 죽음 보다 못한 목숨입니다. 풍뎅이 메뚜기 지렁이 같은 무수한 목숨이 예초기 칼날에 날아갑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풀과 나무가 졸지간에 베어집니다. 아무 이유 없이 생명을 잃고 불구가 되고 쫒겨납니다. 인간의 땅에 그들의 자리는 없습니다.


무수한 생명을 대신해 벌은 내게 '벌'을 내렸습니다. 내 손에 파괴된 수많은 목숨의 가늠할 수 없는 무게를 생각한다면 지금 내 불면의 밤은 고통이라 말할 수도 없습니다. 부어오른 팔뚝을 보며 사해만물 모든 생명의 무게가 다르지 않다는 가르침을 다시 생각합니다.


건강한 삶을 위해 자연에 가까워질수록 살생도 그만큼 가까워지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듭니다. 파괴와 살생이 일상이 된다면 그것이 건강한 삶일 수 있을까요? 인간의 쾌적한 환경과 뭇 생명의 가치는 어느 지점에서 타협할 수 있을까요? 


약효가 떨어졌는지 팔의 통증이 다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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