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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Apr 03. 2021

줄탁동시는 개뿔, 그냥 내버려두라고

고욤나무 새싹과 아들

감나무 묘목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어린 고욤나무를 대목으로 삼고 거기에 감나무 가지를 접붙이는 방식입니다. 대목 만드는 게 일착입니다. 고욤씨앗을 발아시켜 1년 동안 키워야 합니다. 텃밭 농사는 꽤 오랫동안 지어왔어도 나무를 키워 본 적은 없습니다. 더구나 씨앗을 발아시켜 나무로 키우는 건 생소합니다. 경험 부족은 부작용을 초래합니다. 우선 불신입니다. 씨앗에서 과연 싹이 날까? 싹이 난다고 해도 정말 나무로 자랄 수 있을까? 미덥지 못하고 걱정이 앞섭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감나무는 말할 수 없이 거대하고 웅장한 데 고욤씨앗은 작고 보잘 것 없습니다. 겨우내 바짝 말라 있던 고염 열매를 따서 달포를 또 말렸습니다. 수분이라곤 조금도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은 씨앗에 오랜 세월을 지켜 낼 장엄한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더구나 씨앗 껍질은 딱딱합니다. 보드라운 새싹이 두꺼운 외피를 뚫고 나오자면 날카로운 송곳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막 움을 틔우는 씨앗 주머니 어딘가에 그런 물건이 들어 있을 리 없습니다.


불신은 조바심으로 이어집니다. 씨앗을 물에 불렸다가 상토에 심는데, 도무지 싹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아침저녁 수시로 들여다보며 애를 태웁니다. 작은 조짐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에 불을 켭니다. 심지어 흙을 파헤치고 살펴봅니다. 첫 번째 위기입니다. 씨앗은 내 안달복달을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즐기며 발아를 준비합니다. 고욤나무와 감나무로 살아갈 긴 시간에 비추어 본다면 하루 이틀은, 아니 1주일 2주일은 아주 짧은 시간일 뿐입니다. 급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마음이 쪼그라들 즈음 흙이 위로 치받아 올라옵니다. 진즉에 땅속에서 시작되었을 발아가 드디어 내 눈에도 보입니다.


발아만 되면 마음 쓸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떡잎이 먼저 나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줄기가 먼저 나옵니다. 뿌리와 떡잎 부분이 땅에 박힌 상태에서 연두색 고리가 땅을 비집고 올라옵니다.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머리를 땅에 처박고 있는 모양입니다. 생각과 다른 발아 과정을 보며 당황합니다. 제대로 되고 있는 건가 싶습니다. 두 번째 위기입니다. 깜깜한 땅속에서 떡잎을 꺼내주고 싶어 손이 근질거립니다. 굽은 허리를 바로 펴 주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이삼일 이어지는 위기를 무사히 넘기면 껍질을 모자처럼 깊숙하게 눌러 쓴 떡잎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성공적으로 싹을 틔운 고욤씨앗과 인내심을 갖고 이 과정을 지켜본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머잖아 세 번째 위기가 닥칩니다. 떡잎을 감싸고 있는 끈질긴 껍질이 문제입니다. 생명을 품고 지켜낸 장한 자루지만 지금은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로만 보입니다. 껍질 속에 구겨져 있는 떡잎을 보면 안쓰럽고 불편합니다. 몸뚱이는 자꾸 커지는데 비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꼴입니다. 답답하고 짜증날 게 분명합니다. 하루 이틀이면 털어 버릴 줄 알았는데 꽤 오래 갑니다. 기어이 손을 뻗치고 말았습니다. 한 손으로 줄기를 잡고 다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껍질을 벗겨 냅니다. 부화에 임박한 병아리가 안에서 알을 쪼아댈 때 밖에 있는 어미 닭이 같이 쪼아주는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쉽게 빠질 줄 알았던 껍질이 떡잎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습니다. 긴장된 손끝에 힘이 더 들어갑니다. 그제야 떡잎은 껍질의 포박에서부터 어렵사리 풀려납니다. 줄탁동시를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한 일을 해 낸 것 같아 뿌듯합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합니다. 한나절이 지났는데도 떡잎 한쪽이 온전히 펴지지 않습니다. 단단한 껍질이 떨어지고 나면 비좁은 공간에 구겨져 있던 떡잎은 머잖아 예쁜 모양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갓난아기처럼 말간 빛깔로 모나거나 이지러진 구석 없이 세상과 대면합니다. 그런데 이번엔 그렇지가 않습니다. 


손으로 껍질을 잡아 뽑는 과정에서 상처가 나고 말았습니다. 준비 되지 않은 걸 억지로 잡아 뽑은 결과입니다. 오이가 충분히 익으면 꼭지가 어련히 알아서 떨어질 텐데(과숙체락, 瓜熟蒂落), 고새를 참지 못한 겁니다. 곡식이 빨리 자라게 하려고 이삭을 잡아당기는 짓과 같습니다(알묘조장, 揠苗助長). 


줄탁동시에서 ‘탁’은 어미 닭이 밖에서 알을 쪼는 걸 말합니다. 공교롭게도 막대기로 ‘탁’ 내리치는 소리 같습니다. 때리면 아픕니다. 돕겠다는 어쭙잖은 내 행동은 여린 새 잎을 매질 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선한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는 어리석었습니다. 가만 두면 알아서 껍질을 뚫고나와 알아서 싹을 틔웁니다. 답답하고 힘들어 보여도 못 본 채 했어야 합니다. 그냥 내버려 두었어야 합니다. 




껍질이 저절로 떨어져 매끈하고 반듯한 새싹과 운 나쁘게 내 손을 타 찌그러진 새싹을 번갈아 봅니다. 후회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 때 아내 전화가 울립니다. 군에 있는 아들입니다. 입대한지 3개월이 되었습니다. 잘 지낸다고 합니다. 안타깝고 걱정스러웠던 지난겨울에 비해 제 마음도 한결 편안합니다.


지금은 하루가 멀다 하고 안부를 전해올 정도로 살갑지만, 늘 그랬던 건 아닙니다. 중고등학교를 지나는 동안 우리는 꽤 힘들었습니다. 불확실한 앞날에 대한 불안이 서로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져 겉돌았습니다. 아들은 곁을 주지 않았고, 내 마음 속에는 아들을 위한 자리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길을 찾겠지 하면서도 잔소리하고 싶고 화내고 싶었습니다. 무언가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들었습니다. 아빠로서의 권한과 책임을 다하고 싶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방관자에 그쳤습니다. 아들이 줄(啐) 하는 걸 지켜만 보기로 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러니까 아들이 대학을 진학하고, 군대를 가면서 우리는 꽤 좋아졌습니다. 아들은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힘을 쌓는 중입니다. 나는 그런 아들을 뒷짐 지고 바라보는 여유를 배우고 있습니다. 


떡잎이 일그러졌다고 해도 고욤나무가 잘못되는 건 아닙니다. 떡잎을 뒤따라 나오는 본잎은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상상하는 나뭇잎 모습 그대로입니다. 고욤나무로 혹은 감나무로 살아갈 세월에 비춰보면 제 몹쓸 손에 의해 강제 탈피를 당한 건 잠깐의 에피소드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중고등학생 시절의 아들에게 잘못된 탁(啄)을 했다고 해도 아들은 그랬거나 말거나 자기 삶을 꾸려갈 게 분명합니다. 결국 자기 인생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오늘처럼 서로 꽁냥꽁냥 지낼 수 있게 된 건 저에게 오직 방관자의 역할을 강요한 사람 덕분입니다. 

     

     

<참고>

     

줄탁동시(啐啄同時) 줄(啐)과 탁(啄)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가장 이상적인 사제지간을 비유하거나, 서로 합심하여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다음, 고사성어대사전)


과숙체락(瓜熟蒂落) 오이가 익으면 꼭지가 저절로 떨어진다. 때가 성숙하면 일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다음, 고사성어대사전)


알묘조장(揠苗助長) 싹을 뽑아 자라는 것을 돕다. 조급한 마음에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다가 오히려 일을 망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다음, 고사성어대사전)


‘줄탁동시’는 ‘오이가 익으면 꼭지가 저절로 떨어진다.’라는 뜻의 ‘과숙체락(瓜熟蒂落)’과 쌍을 이루어 ‘때가 성숙하면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며, 기회와 인연이 서로 투합한다.(瓜熟蒂落, 啐啄同時)’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로, 원래 민간에서 쓰던 말인데 송(宋)나라 때 《벽암록(碧巖錄)》에 공안(公案, 화두(話頭))으로 등장하면서 불가(佛家)의 중요한 공안이 되었다.(다음, 고사성어대사전)


고욤씨앗입니다. 갓난아기 손톱만합니다.
왼쪽에 고리모양으로 발아한 모습이 보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떡잎이 땅에서 올라오며 허리가 펴집니다. 두꺼운 껍질을 모자처럼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아랫줄 가운데 두개의 모종 이파리가 다른 잎사귀에 비해 일그러져 있습니다. 강제로 껍질을 벗겨내느라 상처를 입었습니다.


#줄탁동시 #과숙체락 #알묘조장 #고욤 #고염 #감나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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