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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Apr 05. 2021

very various berry

모처럼 시골에 왔습니다.

오는 내내 풀들이 걱정입니다.

제 세상인 듯 활개 칠 게 뻔합니다.


그런데 웬걸, 긴 가뭄에 풀들도 맥을 놓아 버렸습니다.

기세 꺾인 풀들 사이로 먼지만 풀풀 날립니다.


 새벽부터 호스로 물을 대 보지만 언 발에 오줌누기입니다.

잠깐 붙들고 섰다가 수도꼭지를 잠가 버렸습니다.



 

파낸 식빵 속에 딸기, 산딸기, 오디, 앵두를 넣고 사과잼을 두른 뒤에 다시 빵을 얹힌 일명 berry burger...햄버거를 즐겨먹지 않지만, 이건 참 맛납니다.

그 와중에도 때가 되니 빨갛게 까맣게 익었습니다.


앵두

딸기

오디

산딸기


4월엔 두릅이며 엄나무순을 마구 내밀며 감동을 주더니,

5월은 꽃구경 철이라 그런지 먹을 게 없었습니다. 

한 달 내내 손가락만 빨았습니다.


그러더니 새달 들어서자마자 이것저것 맛보라며 들이밉니다.

이만하면, 간밤 어둠을 질러 멀리 달려 온 보람이 넘칩니다. 




산골에서 만나는 모든 먹거리는 저마다 내력이 있습니다.

그 사연을 알고 나면 더 귀하고 감사합니다. 

어느 것 하나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선선한 아침바람에 할 일은 잊은 채 아침상을 앞에 놓고 상념에 빠집니다.


1. 앵두


밭가에 앵두나무가 있습니다. 

흔히 알던 앵두나무가 아니라 의아해 하자 예전 주인께서는 양앵두라고 하십니다.

벚꽃 필 무렵, 앵두꽃도 하얗게 장관을 이룹니다.

그러다 때 되면 미련 없이 꽃잎을 떨굽니다. 

꽃을 매달고서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앵두나무 치고 꽤 굵은 이 나무는 오랜 이주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처음 인천항 어느 부두에 있었는데, 화물 일을 하시던 예전 집주인 남편께서 25년 전에 얻어다 서울 어디에 심어 두셨다 합니다.

그러다, 지금 집터에 옮겨 심으신 게 20여년 전입니다.


서해바닷가에서 자라다 서울 한가운데로, 다시 동쪽 산골로 옮겨졌으니, 

나무 치고는 긴 여정을 간직한 샘입니다.


지금은, 간섭하는 이 없이 산속 한가운데서 오직 자연의 때를 즐깁니다. 

자연에서 얻어 다시 자연에 내어주는 순환에 여실히 참여합니다.

매년 달리는 앵두 중에 나무 아래 것은 내가 먹고, 나무 위에 것은 새들이 먹습니다.


2. 딸기


처음 밭에서 딸기 줄기를 봤을 때 난감했습니다.

넝쿨로 기어 번식하는 딸기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터라 반갑지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모조리 캐내기에는 마음이 약했습니다. 

어쩌지 못하는 사이 딸기는 제 길을 갔습니다.


이른 봄 하얀 꽃을 피우고 바람결에 꽃잎을 떨구더니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가느다란 줄기를 부지런히 뻗어 영역을 넓힙니다.


결국 타협을 했습니다.

녀석들을 2평 남짓한 공간에 가두고 바깥으로 나오는 넝쿨을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꽤나 번거롭지만, 그렇게 하고 나면, 딸기는 생명을 유지하고, 나는 딸기를 얻습니다,


시다고 오만상을 쓰는 아들에게 노지에서 자란 건 다 그렇다고 말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내 입에는 달고 향기롭지만, 하우스 딸기에 익숙한, 그래서 딸기의 제철이 눈 덮인 한겨울인 줄 아는 아들에게 그 말이 먹힐 리가 없습니다.


잼 만들기 전에 아침상에 올랐으니, 생으로 먹는 올해 마지막 딸기인 듯싶니다.


3. 오디


반으로 쩍 갈라진 집채만 한 바위가 있습니다. 

그 옆에 멋대로 자란 산뽕나무가 있는데, 열매가 앵두와 같은 철에 익습니다. 

집터 닦기 이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던 터줏대감입니다. 


우리에게 집을 넘길 때 예전 주인께서는 

처음 집터를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야 하나 고민할 때, 

계시처럼 꿈에 저 바위와 뽕나무가 나와서 그대로 두고 조성했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웬만하면 손대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으십니다.

꿈이 아니었으면 진작 사라졌을 그 나무가 장하게도 해마다 열매를 보시합니다. 


어느 해에는 오디술로, 어느 해에는 오디잼이 됩니다.

올해는 잼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4. 산딸기


어릴 때는 산딸기나무를 개찔레라고 했습니다. 

찔레처럼 가시가 박혀 있는 데 착안 한 건데, 가시 말고는 닮은 게 없습니다.


참꽃(진달래)과 개꽃(철쭉), 참두릅과 개두릅(엄나무순), 참나리와 개나리 등 

“개”字는 주로 아류에 붙이는 경향에 비추어 보면, 개찔레는 잘못된 말이었습니다. 

어린 내가 보기에 열매를 내주는 산딸기가 더 “참”했습니다. 


초여름 산속을 해매다 얻어걸린 산딸기를 한 움큼씩 따서 입에 털어 넣으면, 

갈증도 더위도 노곤함도 단박에 날아갔습니다. 

밭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아버지 지게에 간혹 산딸기 넝쿨이 얹혀 있곤 했는데, 

스무개나 되는 딸기가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습니다. 


요즘도 담장을 타고 오르는 넝쿨장미를 보면 아버지 지게에 얹혀 있던 산딸기가 생각납니다.

그런 산딸기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달려 있습니다. 


아침상에 올려놓으니 그림이 새롭습니다.


5. 사과잼


사과나무는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가지는 마르거나 부러져 있기 일쑤고, 몸체가 삭아 금방 주저앉아 버릴 것 같은 것도 있습니다. 

예전 주인께서는 우리에게 집을 넘길 때, 베어내고 새로 심으라고 권하기도 하셨습니다.


소심해서 톱을 들이대지 못하는 사이 사과나무는 해마다 못난이 사과를 내어줍니다.

작년에도 한 바가지 거뒀습니다. 

검은 반점이 촘촘하게 박혀있고, 굵기도 제각각.

단맛보다는 신맛이 강해, 그냥 먹기는 마땅찮아 아내가 잼으로 만들었습니다.


한동안 먹다가 잊었는데, 냉장고 구석에 있던 걸 최근에 발견했습니다. 

보물을 찾은 것 마냥 기뻤습니다.


6. 식빵


베이킹을 배운 아내는 곧잘 빵을 굽습니다. 

문제는 반죽. 오래전에 반죽기를 샀는데, 고장이 난 이후로 뜸해졌습니다.

최근에 큰 맘 먹고 A/S를 받았는데, 돌아온 물건을 보고 하는 말이


"껍데기만 예전 거고 다 바뀐 거 같아..."


사진에 있는 건 반죽기가 다시 가동되고 처음 만든 식빵입니다.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것을 꺼내 버터를 넣고 구워내면,

고소하고 바삭합니다.


7. 커피


생두를 사다 집에서 로스팅을 한지 꽤 오래 되었습니다.

로스터기는 없고 그릇가게에서 산 스텐 궁중펜에 볶습니다.


펜 로스팅의 성패는 화력과 쿨링!

예전에는 블루스타로 했는데, 지금은 LPG에 연결한 주물버너라서 화력은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남은 문제가 쿨링인데, 쿨러가 없는 내가 최근에 택한 방법은 선풍기입니다.

선풍기를 세게 틀어 놓고 몇 번 흔들면 금세 식습니다.


이렇게 볶아낸 원두로 커피를 내립니다.

물을 끌이면서부터 시작되는 설렘은 원두를 갈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서 배가 됩니다.


집안 가득 커피향이 퍼지면, 내게 비로소 아침이 옵니다.


아침상입니다. 드립커피, 사과잼, 홈베이킹 식빵, 앵두, 딸기, 오디, 산딸기,,, 저마다 사연이 있습니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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