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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Apr 07. 2021

어쩌다 자연인

전기없이 보낸 하룻밤 이야기


중도말촌*이 몇 년 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기도 합니다. 

지난 겨울에는 밭 한가운데 너구리가 죽어 있었습니다. 

내 집 그늘에서 죽었으니 내가 거둬야 해 하며 땅을 파고 묻어 주었습니다. 

유난히 포근했으니 망정이지, 한겨울에 땀 깨나 흘릴 뻔 했습니다.


주말에도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아침부터 추적거리는 비를 핑계로 한가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난로불에 고구마를 구워먹으며 시나브로 떨어지는 목련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비가 그지없이 고맙게 느껴집니다.


갑자기 사위가 깜깜해지며 빗소리가 거칠어집니다. 

뒤이어 천둥과 번개가 번쩍 우르르 쾅쾅! 

섬광과 소리가 동시에 터집니다. 

마침 클레식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마왕'을 틀어주면 딱이겠어."라고 말하는 순간 

다시 한 번 번쩍 콰광 내리치더니 전기가 나갑니다. 

근처에 번개가 떨어졌고, 그 충격에 차단기가 나간 겁니다. 

서둘러 차단기를 올려 광명을 복원합니다. 

여기까지는 별다를 일 없는 일상입니다.


더 깜깜해진 오후, 더 편안한 자세로 한껏 늘어집니다. 

흰빛과 주황빛을 들락날락하는 난롯불에 취했다 깼다를 반복합니다 


차를 마시려고 수도꼭지를 틀었습니다. 

아뿔싸! 

물이 안나옵니다. 

숨 넘어갈듯 그르렁거리기만 할 뿐 도통 맥이 없습니다. 

차단기가 나갈때 펌프에 탈이 난 듯 합니다.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려 살펴봅니다.

지하수 펌프에 부속된 인버터에 ^고장^ 메세지가 선명합니다.

'운전'과 '정지'를 반복하긴 했어도 ^고장^ 신호를 내민 적은 없습니다. 


'이건 안되는데' 싶습니다.

한참을 주물러 봤지만 될 리가 없습니다. 

내 손을 벗어난게 분명합니다. 


수리야 어떻게든 되겠지만 '물 없이 하룻밤을 어떻게 보내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밥도 먹어야하고, 화장실도 처리해야하는데! 

세수는? 

양치는?


어두워지기전에 우선 개울물을 몇 통 길어 화장실에 넣어둡니다. 

식수로 쓸 물은 따로 주방에 마련합니다. 

이것으로 끝! 

수전에서 물이 안나와도 살아는 지겠다 싶습니다. 

펑펑쓰던 물을 애기다루듯 해야 하지만 큰 불편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기름기 없는 저녁밥을 먹고 일찍 잤습니다. 

설겆이는 당연히 미뤄둡니다.

다음날 아침, 세수와 양치를 개울에서 하고 

밤새 가라앉힌 개울물로 커피를 마십니다. 


기대와 달리 도랑물 커피는 맛이 없습니다.

커피인지 보리차인지 숭늉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습니다. 

개울에 항상 떠내려오던 썩은 낙엽을 차로 마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개울가 설겆이> 아직 지지 않은 개나리, 활짝 핀 벚꽃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습니다.

이윽고 설겆이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그릇이 담긴 양푼을 들고 개울로 갑니다. 

차갑지만 씻을 만 합니다. 

세제를 쓰지 않고 헹구는 정도라 금방 끝납니다. 


마침 때늦은 개나리와 물오른 산벚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등 뒤를 받치고 있습니다. 

하염없이 흘러도 물은 아내와 꽃나무와 하늘을 넉넉하게 담아냅니다.


오께, 이웃 어른 댁에서 깨끗한 지하수를 얻어와 우선 식수를 해결합니다. 

오후 늦게는 기사님이 오셔서 벼락맞은 인버터를 통째로 교체하며 

24시간에 걸친 '어쩌다 자연인 놀이'는 끝났습니다.


* 중도말촌 : 주중엔 도시, 주말엔 시골





* 펌프 수리 기사님에 타르면 그날 우리집을 포함해 산골 서너 가구의 지하수 펌프가 망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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