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한덩이를 샀습니다.
아는 분이 SNS에서 박 나물 요리를 선 뵈 주신 뒤라 사자고 졸랐습니다.
쪼개려고 도마에 올렸습니다.
달덩이처럼 복스러운, 참 박스러운 게 눈앞에 나타납니다.
조심스럽게 절반을 갈랐습니다.
겉보기완 다르게 칼집은 힘들이지 않고 슥 밀고 들어갑니다.
겉도 하얗지만 속살은 더 뽀샤시합니다.
아직 덜 여물어 몰캉한 씨앗이 나란히 그리고 촘촘하게 박혀있습니다.
그런 게 두 덩어리입니다.
부자가 된 기분입니다.
기름에 볶아 무쳐낸 박나물은 씹을 것도 없이 후루룩 넘어갑니다.
내년부턴 꼭 박을 키워보리라 다짐합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지난 봄 호박 모종 몇 개를 아무렇게나 심었습니다.
거름도 하지 않고 풀도 잡아주지 않고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른바 냅둬농.
그러니 호박도 잘 안 달리고, 달려도 제대로 크질 못합니다.
그나마 따려면 보물찾기하듯 풀밭을 뒤져야 합니다.
용케 두 덩어리를 건졌습니다.
흙을 털어내고 아침 햇살을 정통으로 얻어맞는 댓돌에 올려놓고 물기를 말립니다.
마침, 모처럼, 어쩌다 예초를 마쳐 깔끔해진 잔디밭을 배경으로 두고 보니 그림이 됩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재래종 고추 수비초는 몇년 전 모종으로 구입해 키웠는데, 고춧가루 11근을 얻었습니다.
얼치기 주말농부에겐 적지 않은 수확입니다.
작년에는 씨앗 여나문개를 직파해 씨앗만 겨우 보존했습니다.
그리고 올 봄엔 야심차게 아파트 베란다에서 모종을 키웠습니다.
농가에서는 1월 중순부터 작업한다지만, 다 늦은 3월초에 시작했더니 모종이 부실합니다.
그래도 생명은 강합니다.
늦되거나 말거나, 주인이 발걸음을 많이 하거나 말거나 제 길을 갑니다.
지독한 봄가뭄과 뜨거운 뙤약볕, 긴 장마를 콤보로 얻어 맞고도 어느새 빨간 고추를 매달아 놓았습니다.
첫물 고추를 딸 땐 경건한 마음조차 듭니다.
하나하나 실에 꿰어 시골집 창가에도 걸고 아파트 베란다에도 걸었습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몇 년 전 종자용 옥수수 한송이를 얻었습니다.
거름이 적어서인지 애초에 그런 종인지 알 수 없지만 나무도 크지 않고, 송이도 작고, 알도 조그맣습니다.
그래도 찰지고 달고 부드러워 맛본 사람들은 대개 좋아해 대를 이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종자용으로 그나마 크고 실한 몇 송이를 밭에 남겨 뒀는데, 멧돼지가 습격해 아작을 내고 말았습니다.
친구네 입양 보냈던 걸 다시 얻어오고, 묵은 씨앗으로 올 봄 겨우 밭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일찌감치 종자용부터 확보해 볕 좋은 곳에 걸어두었습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고속도로 옆 광고탑에 사람이 올라가 있는 게 보였습니다.
저 큰 광고탑을 어떻게 관리할까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사람이 직접 올라가서 하는 거였습니다.
워낙 가다서다 반복하는 길이라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 광고판이었는데 광고주 건물이 배경으로 나와 공교롭습니다.
아찔한 높이에서 성큼성큼 걸어 다니며 작업하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아침이라 아직 빛이 따뜻해서 인지 하늘이 더 푸르게 보입니다.
차 유리의 썬팅지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사연 많고 탈 많은 올해도 하늘은 이미 충분히 가을입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2020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