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체티노와 손흥민의 오버랩
2019년 이맘때였습니다. 4월 18일 새벽, 포체티노 감독이 이끄는 토트넘이 과르디올라 감독의 맨시티와 챔피언스리스 8강 2차전에서 맞붙었습니다. 앞선 1차전에서는 홈팀 토트넘이 1:0으로 이겼고, 이날 2차전은 맨시티 홈구장에서 열렸습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통에 끝까지 손에 땀을 쥐어야 했습니다. VAR도 한몫 거든 이날 승부는 4대 3으로 맨시티가 이기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1, 2차전 합계 점수는 4:4로 원정에서 점수를 많이 딴 토트넘에게 준결승 티켓을 안기며 마무리되었습니다. 토트넘 팬에게는 최고의 명승부로 기억될 테고 맨시티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아쉬운 경기였습니다. 토트넘이 8강 두경기에서 얻은 4점 중 3점을 손흥민이 책임졌다는 점에서 새벽잠을 반납한 보람이 컸습니다.
맨시티를 쓰러뜨리자 토트넘 모두가 열광했습니다. 당연합니다. 대부분 맨시티의 우세를 점쳤습니다. 게다가 토트넘은 주포 케인이 부상으로 빠졌습니다. 애당초 열세인 팀이 차를 떼고 시합을 벌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시합에서 이겨 팀 최초로 챔스 4강에 진출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가 그들을 감쌌습니다. 종료 호각이 울리자 겅중겅중 뛰어다니던 포체티노의 모습은 스포츠가 선사하는 카타르시스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 벅찬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과르디올라가 포체티노에게 다가갑니다. 악수를 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명승부라고는 해도 큰 시합을 내주었으니 속이 어땠을지는 짐작할 만합니다. 쓰린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는 게 중계 카메라에 잡힌 얼굴 표정에서 고스란히 읽혔습니다. 속이야 어쨌든 멋진 시합을 함께 하고 승리를 거둔 상대를 축하하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그에게서 위로를 받기 위해 다가갔습니다. 진정한 축하는 패자만이 할 수 있고, 진정한 위로는 승자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포체티노는 과르디올라를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에게 챔스 준결승 진출의 이력을 안겨준 선수들과 부둥켜안고 기쁨을 만끽하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과르디올라는 포체티노가 흥분과 환희를 멈추고 자신을 돌아봐 주길 바랬지만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짓다가 돌아서야 했습니다. 라커룸으로 향하는 빠른 걸음걸이를 통해 그의 심정을 다시 한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명승부가 끝나고 승부가 가려졌을 때 패자는 품격을 지켰습니다. 포체티노가 승리의 감격을 잠깐 유보하고 과르디올라에게 먼저 다가가 악수를 청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습니다. 위로의 말을 건네고 서로 감싸 안은 채 등을 두드려 주었다면 더 멋지겠다 생각했습니다. 패자가 보여준 품격에 어울리는 승자의 아름다운 배려를 보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월요일인 4월 26일 아침 인터넷에선 '손흥민의 눈물'을 다루는 기사가 넘쳐났습니다. 풋볼리그컵(EFL컵) 결승전에서 맨시티에게 패한 뒤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우는 모습입니다. 자세히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제목을 보자마자 2년 전 포체티노와 과르디올라의 엇갈린 발걸음이 오버랩되었습니다.
2년 전과는 반대였습니다. 그때는 토트넘이 이겼지만 이번엔 맨시티가 이겼습니다. 2년 전에는 패자가 승자를 축하하기 위해 짧지만 먼 거리를 걸어갔습니다. 이번엔 맨시티 선수 몇몇이 손흥민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를 건넸습니다. 우승의 기쁨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의 아픔을 먼저 헤아렸습니다. 2년 전 보지 못했던 승자의 아름다운 배려가 있었습니다.
닮은 점도 있습니다. 2년 전 포체티노는 흥분에 겨워 과르디올라를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엔 손흥민이 패배의 비통함에 빠졌습니다. 승자에 대한 축하도 팬들에 대한 감사도 잊었습니다. 2년 전의 과르디올라가 보여준 패자의 품격을 이날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언론에서는 스포츠인으로서의 승부욕과 트로피에 대한 갈망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흘린 눈물의 역사를 그가 일궈낸 성과와 연결시킵니다. 물오른 기량과 엄청난 성취에도 불구하고 우승 경험이 없다는 데서 눈물의 이유를 찾습니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이런 접근방식은 자칫 결과지상주의를 부추길수도 있습니다. 손흥민은 결승전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그리고 결승전이 치러진 피치에서 이미 충분히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승이 좌절됐다고 해서 그동안 일궈낸 성과와 그 과정에서 팬들을 즐겁게 해 준 모든 순간이 퇴색되는 건 아닙니다. '승부욕'과 '우승'이라는 말로 그의 눈물을 정당화하는 것 역시 옳지 못합니다.
슬픔은 라커룸이나 집에서 혼자 있을 때 조용히 곱씹어도 늦지 않습니다. 휘슬이 울린 직후, 거친 숨소리와 굵은 땀방울이 아직 운동장 곳곳에 떠돌고 있는 이때는 미소 띤 얼굴로 승자에게 다가가 축하 인사를 건넸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동료로서, 동업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 하나를 두고 90분간 공방을 벌인 상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승자의 손을 들어 올려주었다면 그의 패배도 더 아름답게 빛났을 것입니다.
손흥민을 우상으로 따르는 수많은 어린 축구인과 어린 비축구인, 그리고 그를 응원하는 수많은 어른들에게 승부보다 과정을 즐기는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그의 다음 결승전에서는 승자로서의 아름다운 배려를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다음 결승전에서는 패자로서의 고귀한 품격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